땅에 떨어진 씨앗은 언젠가는 싹이 튼다

이 사람 ㅣ 제주 토종씨앗 지킴이 추미숙씨

  • 입력 2018.10.28 17:19
  • 수정 2018.10.29 09:46
  • 기자명 심증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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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환자실 생활이 계속되자 ‘이제는 죽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죽음을 앞에 두자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지고 마음정리가 됐다. 그러자 이 세상 모두가 깨끗하고 분홍빛으로 보였다. 그동안 밉게만 생각하던 남편마저도 예쁘게 느껴졌다. 흉부외과 선생님께도 아이들을 부탁한다는 유언도 남겼다. 그렇게 한참을 꿈꾸며 자다 깨어보니 나는 숨을 쉬고 있었다. 애들을 생각해서라도 다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코에 호스를 꽂은 채 이를 악물고 미음 한 숟가락씩 목구멍으로 내렸다. 곡기가 위장 속으로 들어가니 정말 신기하게도 두 눈이 번쩍 뜨였다. 그제야 우리쌀이 진짜 생명이라는 걸 온몸으로 느끼게 됐다.

2007년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제주도연합 창립 10주년 기념 책자에 실린 추미숙씨의 투병기이다. 추씨는 결혼 후 세 아이를 출산하고 나서 중증근무력증이 발병했다. 그리고 13년을 고통 속에서 살다 수술을 하게 됐다. 살기 위한 치료는 그녀를 죽음 문턱까지 몰고 갔다.

“29살 때였죠. 막내가 돌 지나고 얼마 안 되서 갑자기 물체가 둘로 보이고 온몸에 힘이 빠지기 시작했어요. 일은커녕 밥 수저도 못들 정도로 힘이 없고 단추도 못 끼울 정도였으니 생활 자체가 어려웠어요. 심지어 숨쉬기도 힘들었어요.”

결혼하고 애들을 셋 낳고 잘 살고 있다가 갑자기 병을 앓게 됐다. 시집에서는 일하기 싫어서 누워만 있다고 타박만 할 뿐 병원에 데려갈 생각은 하지 않았다. 시어머니는 병원 대신 무당을 찾아 다녔다. “무당한테 가서 물어보고 굿하는 날을 잡아와서는 굿을 했어요. 안 좋은 귀신이 붙었다고, 여러 번 굿을 했죠.” 굿을 한다고 병이 나아질 리가 없었다. 곱게 자란 남편은 아내를 위할 줄 몰랐다. 집안을 챙기고 애들을 건사할 생각은 아예 없고 밖으로만 돌았다.

“남편이 노름에 바람에 없는 돈 있는 돈 다 끌어다 쓰느라 가정은 완전히 망가졌지요. 그래서 집을 내 명의로 해주고 이혼 하자고 했어요.” 그녀는 병이 나고 10년 만에 남편과 헤어지고 애들과 생활하게 됐다. “큰애가 7살 때부터 내가 아프기 시작해서 동생들 돌보고 농사일 거들며 살았어요. 토요일 일요일은 항상 애들이 밭에 나가서 일을 했어요. 나는 밭둑에 앉아 있을 뿐 일을 할 수가 없었거든요.”

추씨가 희귀성 난치병인 중증근무력증을 앓으면서도 삶을 지탱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아이들 때문이다. 특히 큰딸은 아픈 엄마를 대신해서 집안 살림과 동생들을 건사했다.

그녀는 13년간 병마와 싸우다가 우연한 기회에 이 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47살에 수술하게 됐어요. 병원에서 5% 정도 희망이 있다고 했는데 그래도 최후의 방법으로 수술을 선택했어요. 수술은 잘 됐는데 수술 후에 호흡이 힘들어서 중환자실로 다시 실려 갔어요.” 수술 후에 위기가 있었으나 이겨냈다. 그리고는 거짓말 같이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왔다.

희귀성 난치병을 어렵게 이겨내고 제주도 토종씨앗 지킴이로 나선 여성농민 추미숙씨가 자신이 가꾼 텃밭에 앉아 환한 미소를 짓고 있다.
희귀성 난치병을 어렵게 이겨내고 제주도 토종씨앗 지킴이로 나선 여성농민 추미숙씨가 자신이 가꾼 텃밭에 앉아 환한 미소를 짓고 있다.

맏딸의 삶

“옛날에 제주는 살기가 너무 어려웠어요. 부모님이 농사를 지었는데 3남2녀 가르치기가 힘들었죠. 맏이다보니 중학교 졸업하고 집에서 농사일을 도와야 했어요. 그러다가 17살에 작은아버지가 사시는 수원으로 가서 공장에 들어가게 됐어요.” 7~80년대 농촌 가정에 흔히 있는 풍경이다. 특히 가난한 집안의 맏딸은 집안 살림을 보태기 위해 도시도 갔다. 그들은 저임금과 열악한 환경의 공장에서 돈을 벌어 고향에 보내줬다. 자신들의 삶과 미래를 위해서가 아니라 고향에 있는 가족들을 위해서.

“내 또래 친구들은 고등학교에 다니는데 나는 공장에서 일을 해야 하는 게…. 하얀 카라 교복을 입은 고등학생들을 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죠.”

공장월급은 3만원에 불과 했다. 그래도 그 돈을 아껴서 집에 보내고 생활비를 절약해서 텔레비전과 밥솥 같은 가전제품을 하나씩 사서 집에 보냈다. “텔레비전을 사다주니까 동생들이 동네에서 스타가 됐어요. 우리 동네가 30호 정도 되는데 텔레비전은 우리 집에만 있으니까. 동네 애들이 텔레비전을 보려면 우리 동생들한테 잘 보여야 하잖아요. 나중에 애들이 누나 덕분에 유세 좀 떨었다고 했어요.”

추씨는 공장생활로 동생들 학비를 대고 집안 살림을 도왔다. 그러다 아버지께서 딸이 집 떠나 지내는 것이 걱정돼 아프다고 내려오라고 해서 3년 만에 육지 생활을 접고 다시 제주 생활을 시작했다.

“친정동네가 개척단지예요. 그 당시에는 제주도에 양잠하는 사람이 없었어요. 도에서 없는 사람들한테 집 지어주고 토지를 나눠주고 양잠을 해서 살게 했어요. 봄에는 아랫마을에 가서 보리 베어주고 품삯으로 보리를 받아서 먹고 가을에는 고구마 캐고 밭에 남은 것 주워 겨울 양식했어요. 친정어머니는 텃밭에 토란 같은 것을 심어서 그걸로 양식을 했어요. 그 때 어머니가 심은 토란씨앗을 지금도 가지고 있어요. 이때부터 토종씨앗에 관심을 갖게 됐죠.”

오늘 우리는 의식적으로 토종씨앗을 모으고 지키고 있지만 토종씨앗은 농민들의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져 내려온 것이다. 특히 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딸에게 씨앗을 대물림했다. 씨앗을 지키고 계승하는 것은 자신들과 가족들의 삶을 유지하는 중요한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그녀 어머니가 텃밭에 심은 토란은 양식이 떨어진 어느 날 점심식사 꺼리가 되었을 것이다.

추씨는 24살에 동네사람 소개로 이웃에 사는 신랑과 결혼했다. 시댁은 당시에 재산이 좀 있었다. “시부모님께서는 당신들이 고생을 많이 해서 자식은 되도록 일 시키지 않고 귀하게만 키웠어요. 그래서 착실하게 크지는 못한 거 같아요. 그때 사람도 꼼꼼히 보고 환경 이런 걸 봤으면 좋았을 텐데 그런저런 생각 안하고 결혼했어요.” 결혼생활은 순탄치 못했다. 특히 결혼 후 5년 만에 병을 앓게 되었고, 남편은 책임감이란 하나 없이 방탕했고 끝내 집을 나갔다. 결국 남편과 헤어졌다.

추미숙씨가 제주도 내에서 토종종자를 지키는 활동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추미숙씨가 제주도 내에서 토종종자를 지키는 활동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새로운 삶이 시작되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수술 후유증을 이겨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세상이 달라져 보였다. “날아갈 것 같이 너무 좋았어요. 이제 농사일도 마음대로 하게 됐고, 일자리도 찾아 다녔어요. 복지회관 식당일을 다니면서 농사도 지었어요.” 새로운 삶을 산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했다. 그간 병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는데 이제는 뭐든 할 수 있었다.

큰딸은 공부 못한 엄마의 한을 풀어주겠다며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주었다. “큰애가 방송통신고 등록을 한 거예요. 낮에는 직장에 다니고 밤에는 학교에 나가서 공부를 했어요. 그렇게 해서 고등학교를 졸업하니까 큰애가 이왕 했으니까 야간 전문대라도 가라고 권유해서 관광대 사회복지학과에 들어갔어요. 학비는 큰애가 한 학기 대고 작은애가 한 학기 대고 해서 졸업했어요.”

딸들 역시 학교를 다니는 학생이었지만 시간을 쪼개 아르바이트를 해서 자신의 학비는 물론 엄마의 학비 뒷바라지까지 하며 응원했다.

어려서부터 사무쳤던 공부에 대한 한은 그녀의 두 딸이 풀어줬다. “흰 카라 교복에 사무쳤던, 공장생활을 하면서도 떠나지 않았던 한을 아이들 덕에 싹 씻을 수 있었어요.” 추씨는 아득한 삶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해나가면서도 이 대목에서는 표정이 밝아지고 목소리가 들떴다.

건강을 회복하면서 농사와 직장생활 그리고 공부도 마치게 됐다. 제2의 인생 시작이다.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주말에는 농사를 지었어요. 큰딸과 둘째딸이 전문대를 졸업하고는 억척같이 돈을 모았어요. 6,000만원을 손에 쥐었는데 제게는 너무나 큰돈이었죠. 이 돈으로 땅 1,000평을 사서 공동 명의로 하자 했어요. 그 땅과 남의 땅 1,000평 얻어서 2,000평 농사를 지었죠.”

착하고 성실한 딸들은 항상 추씨의 커다란 버팀목이고 울타리가 돼 주었다. 이제 건강도 회복하고 땅도 마련해 안정된 삶을 꾸려가는 토대가 마련됐다. 평생 가난하게 살아온 처지에서 당연히 돈이 되는 농사에 매달렸을 터인데 그녀는 오랜 투병생활 속에서 깨달은 먹거리의 중요성을 농사에서 실천했다. “처음에는 제초제는 하지 말고 농사를 짓자고 다짐했어요. 그러다가 차차 토종농사로 전환했지요.” 토종농사를 하게 되면서 추씨는 새로운 삶의 의미를 찾게 됐다.

“친정어머니께서 토란씨앗을 자연스럽게 물려주셨듯이 종자는 농민들이 대를 이어 가며 전해온 것인데, 대기업이 종자를 장악해서 앞으로는 농민들이 마음대로 종자를 채종하거나 나눌 수 없게 될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토종종자를 지켜야 해요.”

추씨는 건강을 회복하면서 전여농 활동을 더 열심히 했다. 특히 토종종자를 지키는 일에 열의를 다했다. 제주도에서 전여농 회원들과 함께 토종종자 수집에 나섰다. “마당에 텃밭이 있는 집에 가면 어르신들이 종자를 갖고 계셔요. 그러면 조금씩 얻어서 모으기 시작했어요. 제주도에서만 119가지 토종씨앗을 모았죠.”

전여농 제주도연합은 2012년에 5개월간 제주도내 가가호호를 방문해서 토종씨앗을 조사하는 사업을 실시했다. 이렇게 조사하여 찾은 토종씨앗을 정리해 책을 내기도 했다.

토종종자를 찾고 보존하는 일은 마땅히 정부가 해야 할 일이지만 한국에서는 전여농이 정부의 무관심 속에서 토종씨앗을 찾고 지키고 있다. 이러한 전여농의 토종씨앗 지키기 활동은 전 세계 농민들에게 모범적 사례로 알려지고 있다.

“돈은 전혀 안 되는 농사예요. 돈으로 농사짓는 것이 아니라 나도 먹고 우리 아이들도 먹는 거니까 하는 거죠. 누군가는 해야 종자가 대를 이어가지 않겠어요. 종자 대가 끊기면 모두 사다가 농사를 지어야 하는데 언젠가는 종자가 없어서 농사를 못 짓게 될지도 몰라요.” 토종농사는 우리가족이 먹을 건강한 먹거리를 생산하고 종자를 지킨다는 자긍심으로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활동을 서서히 소비자들이 알아주기 시작했다.

“이렇게 농사를 지어서 직거래로 팔다 보면 먹어본 사람은 다시 찾아요.” 건강한 먹거리, 토종종자를 고수하면서 10여년을 지내오며 돈 안 되는 농사는 어느덧 돈 되는 농사로 변해갔다. 소비자들이 그녀의 농사를 알아주기 시작한 것이다. 큰돈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제 농사로 살림을 꾸려갈 수 있는 상황이 됐다. “6년 전에 농업기술센터 지원으로 작업장을 지어서 생산자 7명이 꾸러미 작업을 해서 한 달에 두 번씩 서울로 보내요.”

꾸러미 작업장은 추씨의 희망의 공간이다. 작업장 텃밭에는 30여 가지 토종씨앗이 뿌려져 있다. 그녀는 아침마다 작업장 텃밭에 나와 심겨진 작물들의 이름을 부르며 하루를 시작한다고 한다. “제가 지금까지 살면서 철학이 있어요. 땅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씨앗은 거짓말을 하지 않아요. 땅에 떨어진 씨앗은 언젠가는 싹이 트고 결실을 맺어요.”

절망적인 상황에서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난 그녀의 결실도 영글어 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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