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아나운서③ 아나운서는 9급 공무원이었다

  • 입력 2018.10.28 17:11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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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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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이 수복되었다. 그러나 지금의 덕수초등학교 자리에 있던 옛 KBS 건물은 폭격을 맞아 잿더미가 돼버렸다. 부산으로부터 돌아오긴 했으나 방송국 식구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어져버린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경성방송의 청취료 징수 업무를 보던 방송협회 건물이 중구 정동에 있었는데, 하는 수 없이 그 허름한 목조건물에다 KBS의 간판을 달았다. 그 방송국 건물이 얼마나 허술했는지를 증명해 주는 에피소드가 있었다.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이른 아침, 음악프로 진행을 맡은 김 아무개 아나운서가 잠이 덜 깬 모습으로 쩍쩍 하품을 하면서 스튜디오에 들어와서는 마이크 앞에 앉았다. 드디어 프로듀서의 사인이 떨어지자 오프닝 멘트를 시작했다.

-전국에 계신 청취자 여러분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지금 서울지방에는 계절을 재촉하는 비가 촉촉이 내리고 있습니다. 환절기에 감기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음악 보내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음악이 나가는 사이에 스튜디오 안팎에서 한바탕 난리가 났다.

“당신 미쳤어? 뭐, 비가 촉촉이 내린다고? 하늘에 구름 한 점 없고 새벽별만 총총한데?”

“아니, 저기 스튜디오 창문으로 빗방울 흘러내리는 모습이 보이기에….”

어찌 된 일이었을까? 임택근 아나운서의 얘기를 들어보자.

“나중에 알고 봤더니 위층에서 숙직하던 직원이 화장실에 가기 싫으니까 바깥을 향해서 대충 소변을 봤던 모양인데, 그 오줌 방울이 아래층 스튜디오 창문으로 흘러내렸던 것이지요. 그걸 보고 촉촉이 비가 내린다 운운했으니…. 청취자들한테서 전화가 오고 난리가 났어요.”

그런 형편이었으니, 그 시기 방송국 직원들의 처우 또한 말이 아니었다. 당시의 KBS는 국영방송이었기 때문에, 아나운서를 비롯한 방송국 직원들은 공무원 신분이었다. 임택근 아나운서의 경우 처음 방송국에 입사하자 서기보 발령장을 주더라고 했다.

“서기보도 호봉이 정해져 있어서 한 호봉 한 호봉 올라가다 보면 보(補)자를 떼고 서기가 되고, 그 다음에 주사보 몇 호봉…그런 식이었어요. 월급이 그야말로 쥐꼬리 만했지요. 국가재정이 열악한 데다 더구나 전쟁 통이었으니까요. 아나운서들의 경우 6.25 직후까지만 해도, 쌀 한 가마를 사려면 넉 달 치 봉급을 모아야 했거든요. 저는 부모님 덕분에 큰 어려움 없이 지냈지만, 다른 이들은 모두 생활고에 시달렸지요.”

어느 날 아침, 이순길 아나운서가 방송국 숙직실에서 싸늘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부산 피란 시절, ‘심문’을 ‘고문’으로 잘 못 발음했다가 3개월 감봉처분을 받은 바 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개인적인 고민이 따로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와 친했던 동료들에 의하면, 결국 극심한 생활고가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이었다.

동료 직원들이 주머니를 털어 조촐하게 장례를 갖췄다. 영전에 호떡 몇 개를 올려놓고 치렀던 그의 장례식장에는, 아나운서들이 자주 드나들면서 외상술을 먹던 인근 빈대떡집 주인도 찾아와서는, 이순길 아나운서의 외상값을 탕감해 주겠다면서 서러워하기도 했다. 하기야 전쟁의 폐허 속에서 어려움을 겪은 사람들이 어찌 아나운서들뿐이었겠는가.

라디오 청취자들의 기억 속에서 아나운서를 ‘방송의 꽃’으로 인식하게 해준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스포츠 중계였다. 새내기 아나운서 임택근이 처음 맡게 된 중계방송은 축구경기였다는데, 당시 그 분야의 명 캐스터로 소문난 서명석 아나운서에게 찾아가 조언을 구했다.

“첫째로는 경기규칙을 완전히 숙지해야 돼. 가령 공이 심판의 몸에 맞고 들어갔을 경우 심판은 운동장의 설치물로 간주하기 때문에 골로 인정한다, 이런 예외적인 규칙까지도 말이야. 그 다음으로는 말을 빨리 하는 훈련이 돼 있어야 해.”

그래서 임택근은 말을 빨리 하기 위한 기상천외한 실습방법을 개발해 냈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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