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평등밥상을 위해

  • 입력 2018.10.28 17:09
  • 기자명 임은주(경기 여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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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은주(경기 여주)
임은주(경기 여주)

진즉 뽑힌 고추나무에서 고추가 말라가고 있습니다. 뽑힌 고추나무들 옆, 된내기를 피하라고 천막을 씌워놓은 고춧골 한 고랑을 잡아 끝물고추를 땄습니다.

밥과 반찬을 담당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수확보다 뒤처리가 더 힘듭니다. 밭에서는 욕심껏 땄는데 저녁에 열심히 다듬고 분류하는데도 끝이 보이지 않는 일에 밭에서 부렸던 욕심을 후회합니다. 간신히 크기로 나누고 크지 않은 것들의 꼭지를 따 씻은 후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짧은 잠을 접고 일어나 물기가 빠진 고추로 장아찌를 담고 멸치랑 볶고 종종 썰어 고추 간장을 만들었습니다. 틈틈이 밥하고 국 끓이고 나물 무치고 빨래 널고 청소기를 돌리고 밥상을 차렸습니다.

밥상을 차려도 앉지 못하고 밥 한술 입에 넣고 세수하고 밥 한술 입에 넣고 양말 신고 밥 한술 입에 넣고 옷을 갈아입습니다. 집안 일 대충 마무리하고 나가려면 아침 밥 먹는 시간가운데 절반 이상은 서서 밥을 먹습니다.

반면 같이 아침밥을 먹는 우리 남편은 아주 한가합니다. 밥 먹으라고 애타게 불러대도 이 일 저 일 다 보고 핸드폰으로 이런 소식 저런 소식을 다 읽은 다음 식탁에 앉아 길고 고요한 기도를 합니다.

입에 밥이 들어가는지 양말이 들어가는지 정신 못 차리는 나에게 식사기도 하고 있는 남편은 딴 세상사람 같습니다. 누구에게 어떤 마음으로 저렇게 기도를 하고 있는지 궁금할 때가 많습니다.

기도를 마친 남편은 밥에 잡곡을 왜 안 넣었는지 왜 많이 넣었는지를 묻습니다. 국과 반찬이 짜네, 싱겁네를 평가합니다. 된장을 꺼내 놓으면 고추장이 더 낫다는 조언을 합니다. 어느 날은 짝짝이로 놓인 젓가락을 가리키며 “맨날 짝짝이로 놓는다” 각성을 시킵니다.

딴 세상사람 같던 남편이 이 세상에 뿅하고 나타나 내게는 잔소리로 들리는 질문과 평가와 조언을 할 때, 종종 식탁 위의 그릇들을 확 쓸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습니다. “이제부턴 쭉 직접 해 먹어”라는 짧은 한마디를 내뱉으면서….

그러나 나는 매일 아침 굴뚝같은 마음을 접고 가정과 여주여성농업인센터의 평안하고 원만한 하루를 위해 남은 밥을 입에 넣고 후다닥 집을 나옵니다.

일한만큼 벌고 일한만큼 대접 받는 세상. 남편도 그 세상을 만들기 위해 살아왔다는 점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일한만큼 대접받는 세상을 바라며 살아가는 우리는 정작 다른 사람들에게 일한만큼 대접하고 일한만큼 감사하고 있는지 되돌아봤으면 좋겠습니다.

논에서 베어낸 벼가 쌀이 되고 밥이 되어 입에 들어오기까지, 밭에서 딴 고추가 고춧가루로, 장아찌로 입에 들어오기까지 애쓰는 사람들의 노력과 공을 당연시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꼭 한번 되돌아봤으면 좋겠습니다.

동전의 양면처럼 모든 사람들이 일한만큼 벌고 일한만큼 대접받고 일한만큼 감사받는 세상은 일한만큼 대가를 주고 일한만큼 대접하고 일한만큼의 감사를 표현하는 세상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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