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아나운서② 6.25 발발 - 아나운서들의 피란살이

  • 입력 2018.10.21 20:28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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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이상락 소설가

1951년 부산의 대청동 언덕바지에 자리한 KBS의 부산 지방 청사.

갓 스무 살의 풋내 나는 젊은이가 스튜디오에 들어서더니 이윽고 마이크 앞에 앉는다. 심호흡 한 번으로 숨을 고르고 나서, 드디어 방송을 시작한다.

여기는 대한민국 중앙방송국입니다, KBS!

이른바 ‘콜 사인’이라고 부르는 단 5초짜리 이 방송이 아나운서 임택근의 데뷔작품이었다. 그런데 부산의 ‘지방’ 방송 청사에서 왜 ‘중앙’ 방송국이라 했을까?

전쟁이 한창이었기 때문에 서울에서 내려간 방송 팀이 피란지인 부산에다 얼기설기 중앙방송을 꾸린 것이다. 당시 연희전문(연세대) 역시 피란지인 영도의 천막교실에다 대학 간판을 걸었는데, 그 학교 정치외교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이던 임택근이 아나운서로 입사한 것이다.

평시 같으면 대학 졸업장을 제출해야 응시자격을 부여했다. 하지만 전쟁 통인데다, 아나운서가 되고 싶다고 막무가내로 떼를 쓰는 바람에, 얼떨결에 응시라도 한 번 해보라고 허락을 했었는데, 그가 그만 합격을 해버린 것이다.

“서울에서 내려간 방송국 식구들이 다 모였으니 얼마나 혼잡했겠어요. 밤이면 잠 잘 데가 없어서 책상 위에서도 자고, 비좁은 스튜디오에서도 이러 저리 널브러져서 코골이 교향곡이 울려 퍼지고….”

임택근 씨의 회고다. 그래도 방송국 직원인 바에, 거적때기 둘러치고 한뎃잠을 자야 했던 다른 피란민들의 고통에야 어찌 견줄까만.

당시는 비상 전시체제였기 때문에, 아나운서들 역시 국방부 정훈국의 심리전 요원으로 차출되어서 군복을 입은 채로 비행기를 타고 선무방송을 하기도 했다. 그 방송을 ‘보이스 오브 프리 코리아’(Voice of Free Korea)라고 했다. 굳이 우리말로 옮기면 ‘자유 대한의 목소리’쯤 된다. 이런 식이다.

인민군 전사 여러분! 자유대한의 품으로 넘어오십시오! 미그 제트기를 몰고 귀순한 공군 전사들에게는 20만 달러의 보상금을 드립니다. 인민군 여러분! 망설이지 말고 자유의 품으로….

그 무렵 대청동의 부산방송국 청사 인근에는 미군부대 막사가 있었다. 그 곳에 있는 외신 텔레타이프로 들어온 전쟁 관련 뉴스는 번역되어서 KBS측에 넘겨졌고, 아나운서들은 그 번역문 원고를 천천히 또박또박 읽어 방송에 내보냄으로써, 전국의 언론기관이나 행정기관 종사자들이 받아 적을 수 있게 했었다. 그것을 ‘기록 뉴스’라고 했다. 그런데 한 번은 아나운서의 실수로 심각한 사건이 발생했다.

“전쟁이 한창이던 때에 인민군의 노금석 상위(대위)가 미그15기를 몰고 남쪽으로 귀순해온 사건이 있었어요. 그래서 유엔군 사령부에서 일단 조사를 했을 것 아니겠어요? 그 뉴스가 번역되어서 방송국으로 넘어왔지요. 당시 이순길 아나운서가 그 번역문을 낭독해서 내보냈는데…‘유엔군 사령부에서 그 조종사를 심문(審問)하는 중이다’ 이렇게 읽어야 할 것을, 한자 한 글자를 잘 못 읽어서 ‘고문하고 있다’, 그래버렸어요. 다음 날 평양방송에서는 남쪽에서 노금석 상위의 손톱을 뽑고 전기고문을 하고 있다는 식으로 역습을 했고…. 일반 뉴스 방송할 때처럼 속사포로 빨리 읽어버렸으면 그냥 지나갔을 텐데, 기록뉴스라 아주 천천히 또박또박 읽는 바람에 사단이 난 거지요.”

이순길 아나운서는 그 어려운 피란살이 중에 감봉 3개월의 중징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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