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무장투쟁의 거목, 박용만을 기리다

암살 90년만에 올리는 진혼제

  • 입력 2018.10.19 11:58
  • 기자명 정경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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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정경숙 기자]

지난 17일은 우성 박용만 선생이 비극적 최후를 맞은 지 90년째 되는 날이었다. ‘철원독립운동기념사업회’는 독립운동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음에도 무덤조차 없는 그를 기려 첫 추모제를 지냈다.
지난 17일은 우성 박용만 선생이 비극적 최후를 맞은 지 90년째 되는 날이었다. ‘철원독립운동기념사업회’는 독립운동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음에도 무덤조차 없는 그를 기려 첫 추모제를 지냈다.

올해는 독립운동가 박용만이 비극적 최후를 맞이한 지 90주년이 되는 해다. 미주 3대 독립운동가 중 한 사람으로, 이승만이 외교, 안창호가 교육운동의 길을 갔다면, 박용만은 무력투쟁노선을 견지했다.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난 박용만은 일제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 반대 운동에 참여했다가 한성감옥에 투옥된다. 이후 미국으로 망명, 네브래스카주립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 재학 중에는 샌프란시스코 ‘신한민보’의 주필로, 졸업 후에는 하와이 ‘국민보’의 주필로 활약했다.

최초로 해외 각지의 한인 대표를 모아 ‘애국동지대표회’를 조직해 독립운동의 방향을 모색했다. 해외 최초의 사관학교인 ‘한인소년병학교’를 네브래스카주에 설립했고, 하와이로 옮긴 뒤에는 ‘대조선 국민군단’을 조직해서 군사훈련을 실시, 무장투쟁의 노선을 실천해갔다. 베이징에 ‘대륙농간공사’를 세워 군사운동의 근거지를 구축하고, 무장독립투쟁의 지속성을 위해 내몽고지역에 한인들을 집단 이주시켜 둔전병을 양성하는 것을 추진하기도 했다.

그러나 해방 이후, 한국 현대사는 물론 독립운동사에서도 희미한 존재가 됐다. 고향인 철원에서도 박용만이란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이 몇 되지 않는다.

비극적 최후를 맞이하고 무덤조차 없는 그를, 지난 17일 고향 철원의 후배들이 ‘우성 박용만 선생 서세 90주년 추모제’라는 이름으로 그가 태어난 생가터로 불러내 진혼제를 올렸다. 박용만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추도사, 삶과 업적을 담은 연극, 비참한 죽음을 달래는 진혼곡 이후 생가터에 표지목을 세우고 다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것으로 추모제는 끝났다.

행사를 기획하고 추진한 ‘철원독립운동기념사업회’는 농민회원과 향토사학자를 중심으로 전우회원과 유림회원 등, 철원에서는 보기 드물게 좌우이념을 떠나 오로지 지역의 독립운동가를 되살려내 당당한 역사로 자리매김하려고 결성한 단체다. 이번 추모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가는 독립운동가들을 지금 여기 현장으로 불러냈다는 데에 큰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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