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농경사회 사람들] 좌분선 우늠이③

  • 입력 2018.10.20 11:52
  • 기자명 이중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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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기 시인

이재후 씨가 술병이 들어 거동이 불편해지면서 변소길에는 큰댁 작은댁이 양쪽에서 부축을 해야만 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작은댁이 쪼르르 왼쪽 겨드랑이 밑에 들어가 으으어, 소리를 질러야 허리가 제법 꼬부라진 큰댁이 느린 동작으로 와서 오른쪽 겨드랑이 밑으로 들어가 굽은 등을 폈다. 큰딸이 차를 몰고 와 병원으로 갈 때도, 병원에서 돌아와 차가 대문 앞에 섰을 때도 부축은 당연히 작은댁이 왼쪽이었고, 큰댁은 뒤늦게 영감 오른쪽 겨드랑이 밑으로 들어가 굽은 등을 펴 한껏 밀어 올려야 했다. 그 모습이 한동안 동네사람들에게 노출되면서 떠돌아다니는 말이 ‘좌분선 우늠이’였다. 언제나 한결같이 왼쪽은 작은댁이었고 오른쪽은 큰댁이 부축하더라는 것이었다.

작은댁 오라비들이 들이닥친 건 그 무렵이었다. 작은댁은 부리나케 부엌으로 달려가 술상을 차린다고 바쁜데, 눈치 채서 호미 들고 뒷밭에라도 갔으면 좋으련만, 큰댁은 눈초리를 치켜 올리고 지신 밟듯 하염없이 마당에서 어정거리고 있었다. 술이래야 병들기 전에 마시다 반쯤 남은 대병 소주에 반찬 두어 가지 올린 술상을 들고 작은댁이 방안으로 들어가자 오라비들이 손짓으로 물리쳤다. 결 고운 웃음을 입가에 머금고 있던 작은댁이 풀죽은 모습으로 사랑채 처마 밑에 쪼그리고 앉아 땅만 내려다보고 있을 때, 큰댁은 굽은 허리 그대로 대문간에 서서 먼 하늘을 올려보다가는 쪼르르 방문 앞으로 달려와 귀를 곧추세우곤 했다.

건성안부만 주고받은 뒤 죽을상을 하고 겨우 앉아 있는 이재후 씨 앞에 범강장달 같은 두 오라비는 그러나 더 죽을상을 짓고 하소연이 길다. 몇 해 전이었던가, 두 오라비들은 이 집으로 들이닥쳐 이재후 씨를 다그친 적이 있었다. 벙어리 여동생이 아들 낳았다는 소식을 듣고 돌이 지나도록 기다렸다가 달려와 처음에는 하소연하다가 나중엔 으름장을 놓곤 했었다.

우리 동생이 평생을 부엌데기로 산들 오래비랍시고 무슨 염치가 있어 큰소리치며 데려갈 형편 아니네만, 이 집에 와서 위로 아들 둘에 밑으로 딸 둘까지 낳았으니 깜냥에 여자노릇이야 하지 않았겠나. 그렇다고 명자 엄마 내쫓고 우리 동생 이름 석 자 자네 호적에 올리라고 다그칠 엄두야 애당초에 없네. 자네 몸 그렇다고 막말로 들릴까 싶어 조심된다만, 내일이라도 우리 동생 주소라도 이 집으로 옮겨주게나. 이 사람아,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제?

그 말소리가 흘러나오는 방문 앞에서 큰댁은 아예 펑퍼져 앉아 있었다. 여차하면 한바탕 법석을 피워 작은댁 두 오라비를 쫓아낼 작정이었지만, 그러나 두 오라비는 그 말을 끝으로 일어나더니 소리 없이 돌아갔다. 작은댁이 손안에 말아 쥔 지폐 한 장을 뿌리치는 두 오라비 중 어느 주머니에 쑤셔 넣어주기까지 작은 파문만 있었을 뿐이었다. 돈 한 푼 만지지 못하는 작은댁에게 그 지폐가 어디에서 나왔겠는가. 방안에서 흘러나오는 하직인사 소리에 앞섶 여미며 황급하게 뒤란으로 사라지는 큰댁을 작은댁 두 오라비는 보지 못했다.

그리고 얼마 후, 이재후 씨는 먼 길을 떠났다. 영감 가고, 스무 해 가까이 두 동서 의지가지가 참 따습다. 왼쪽 다리 잘 못 쓰는 큰댁 부축해주며 으으어, 무어라 소리치는 벙어리 작은댁 말소리를 큰댁은 알아듣는다. 작은댁 입술 모양과 손짓으로 대번에 알아차린다. 큰댁 김늠이 씨가 경노당 갈 때마다 데려다주고, 저녁때가 되면 데리러오는 박분선 씨가 저기 윗말에 있다. 벙어리 작은댁이 그 집으로 살러 온 내력이야 굳이 꺼낼 이유는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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