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아나운서① “아세요? 임택근-이광재!”

  • 입력 2018.10.14 07:24
  • 수정 2018.10.14 07:25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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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이상락 소설가

온 나라를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2002 한국-일본 월드컵 대회’.

사상 최초의 16강 진출을 목표로 삼았던 한국 대표팀이 4강 진출이라는 기적을 연출해 내자, 전국 방방곡곡에 ‘대-한-민-국!’을 연호하는 국민의 함성이 메아리쳤는데….

그 감격적인 경기 상황을 텔레비전 중계화면으로만 감상했던 사람들은(특히 1950~60년대를 살았던 나이든 축이라면 더욱), 매우 소중한 추억거리 하나를 놓치고 말았다.

요즘이야 모든 경기 중계를 TV로만 하지만, 2002 월드컵 당시엔 한국이 출전한 경기를 라디오로도 중계했다.

한국과 폴란드의 대결이 열렸던 2002년 6월 24일 저녁의 부산 월드컵 경기장 중계석 부스에는 이채롭게도 백발이 성성한 칠순의 아나운서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드디어 경기가 시작되고 약간은 떨리는, 그러나 매우 노숙한 어나운스먼트가 라디오 전파를 타기 시작했다. 이윽고 전반 26분.

“폴란드 진영 측면에서 미드필더 이을용, 중앙으로 볼을 연결합니다. 한국의 황선홍 선수 볼 받아서 오른 발로 슈우웃! 꼬올인! 드디어 첫 골이 터졌습니다. 조국에 계신 동포…아니, 청취자 여러분 기뻐해 주십시오. 우리 한국 팀이….”

골이 들어간 순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치는 백발성성한 그 아나운서의 목소리는 차라리 절규에 가까웠다. 그 사람이 누구냐 하면 왕년의 명아나운서 임택근이다.

“어떻게 방송을 했는지 몰라요. 얼마 뒤에 유상철의 추가골이 터졌을 때는 나도 울고, 해설자도 울고, 감정이 복받쳐서…. 아, 그런데 ‘고국에 계신 동포여러분…’ 그 소리가 무의식중에 나와 가지고…. 왕년에 해외에서 방송을 했던 버릇 때문이에요. 어떤 때는 서울운동장(뒷날의 동대문구장)이나 장충체육관에서 중계를 하면서도 고국에 계신 동포여러분 운운했다니까요.”

임택근 씨의 얘기다. 내가 서울의 자택으로 찾아가 임씨를 만나 취재했던 때는 월드컵의 열기가 조금은 가신 2003년 3월이었다. 1932년생이니 그때가 일흔 두 살이었다.

그런데 2002 월드컵에서 임씨와 번갈아가며 MBC 라디오의 중계 마이크를 잡은 또 한 사람의 원로 아나운서가 있었다. 1960년대에 MBC의 임택근과 쌍벽을 이뤘던 KBS의 이광재 아나운서가 그 사람이다. 두 사람은 초기엔 KBS에서 함께 근무했는데 임택근 씨가 직속 선배였다.

특히 애국심을 선동(?)하는 웅변 투의 목소리로 ‘고국에 계신…’을 외쳐대던 이광재 아나운서의 중계방송은 우리 같은 청소년들을 전율하게 만들었다. 이씨는 1960년대 말에 미국으로 건너가 2년 기간 예정으로〈미국의 소리(VOA)〉방송을 맡았는데, 귀국하지 않고 아예 그 곳에 눌러 살다가 지난 2012년에 별세했다.

그렇다면 이 첨단 디지털 세상에 왕년의 두 원로들을 소환해서 ‘라디오 중계’라는, 그 매우 생경하고도 고전적인 프로그램을 기획한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문화방송 라디오 본부장한테서 전화가 와서, 월드컵 라디오 중계방송을 좀 해달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만 해도, 난 그저 무슨 이벤트로 잠깐 하는 오락프로그램인 줄만 알았어요. 그런데 옛날에 하던 대로 정식으로 중계방송을 해달라는 거예요. 이광재 씨도 미국에서 오기로 했다고…. 마이크를 놓은 지가 34년이나 됐잖아요. 그 동안에 바뀐 경기규칙도 숙지를 해야 하고, 포지션별로 선수 이름도 외워야 하고…야,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더라고요. 준비하는 며칠 동안 떨려서 잠을 거의 못 잤어요.”

그러니까 순전히 ‘임택근·이광재’를 기억하는 장년층 청취자들에게, 왕년의 추억을 일깨워주기 위한 서비스 차원에서 마련되었다는 얘기다.

1951년에 KBS에 입사하면서 마이크를 잡았던 임택근은 격변의 시절, 특히 라디오 방송과 애환을 함께 해온 우리 방송사의 산 증인이기도 하다. 그의 증언을 토대로, 겉으로 화려하게만 보였던 라디오 방송 아나운서들의 애환서린 자취를 함께 더듬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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