밭담, 제주 농업의 이정표

  • 입력 2018.10.07 11:04
  • 수정 2018.10.07 11:07
  • 기자명 한우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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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한우준 기자]

여러 가지 크기의 돌들을 맞물리게 쌓아 제주만의 독특한 풍경을 자아낸다. 이른바 ‘밭담’이다. 제주 농업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제주만의 역사와 문화다. 지난 2일 제주도 제주시 구좌읍 평대리, 밭담이 쭉 이어져 있는 한 당근밭에서 여성농민들이 풀을 매고 있다.한승호 기자
여러 가지 크기의 돌들을 맞물리게 쌓아 제주만의 독특한 풍경을 자아낸다. 이른바 ‘밭담’이다. 제주 농업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제주만의 역사와 문화다. 지난 2일 제주도 제주시 구좌읍 평대리, 밭담이 쭉 이어져 있는 한 당근밭에서 여성농민들이 풀을 매고 있다.한승호 기자

 

제주 밭담의 기원엔 여러 가지 설이 있어 확실하진 않으나 후손들이 ‘밭담’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처럼 모두 농업과 관계가 있다. 개간하며 나온 돌로 구획을 정리하고, 강한 바람을 막고, 가축으로부터 작물을 보호하는 등 제주 전통 농업의 핵심 시설이었다.

밭담은 한줄로 쌓은 ‘외담’이 대부분이지만, 농경지 사이로 길이 필요하면 두줄로 ‘접담’을 쌓고 그 사이를 작은 자갈로 채워 통로를 낸 ‘잣질’로도 만든다. 망자가 묻힌 곳에는 봉분을 보호하기 위해 튼튼하게 둘러싼 ‘산담’도 보인다.

밭담은 대개 큰 돌들이 아래에서 지지하고 그 위에 점차 작은 돌들을 서로 맞물리게 쌓아 나가는 방법으로 지어지지만, 어떤 밭담에선 반대로 큰 돌들이 위에 올라가 있는 모습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잡굽답’을 통해 이곳이 그나마 비옥한 편에 속해 많은 돌들이 나오지 않았다가 개간을 통해 나중에서야 큰 돌을 출토해 그 위에 쌓았다고 추론해볼 수 있다. 혹은 개간한 땅과 그렇지 않은 땅의 높이가 차이나니 우선 작은 돌로 절단면을 채워 토사 유출을 막지 않았을까하는 생각도 해봄직 하다.

돌 쌓는 일은 쉬워 보이지만 아무렇게나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돌챙이’로 불리는, 생업과 전문석공을 겸하는 사람들이 주로 돌을 쌓았다. 4.3 사건 땐 곳곳에서 돌성을 축조한다며 밭담을 헐어 돌을 가져갔다가 다시 되돌려놓기도 했다. 밭담에 얽힌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면 이 하찮은 돌들이 제주농촌의 역사와 문화에서 대단히 큰 비중을 차지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높은 곳에 올라서 본 풍경을 묘사해 ‘흑룡만리’라고도 표현한다. 검은 현무암으로 만든 돌담이 구불구불 끝도 없이 늘어선 모습을 빗대 부른 것이다. 고성보 제주대학교 교수 연구팀은 지난 2008년 표본조사를 통해 제주 밭담의 총 길이가 2만2,000여km 정도 될 것이라고 추산했다. 제주도의 면적이 1,825㎢이고 섬을 두른 해안선 길이가 253㎞에 불과하니, 밭담은 그야말로 섬 구석구석까지 모세혈관처럼 자리하고 있는 셈이다. 남해 바다도 한라산도 좋지만, 섬 어디에서도 공통적으로 이곳이 제주라고 느끼게 하는 ‘제주 경관’의 핵심은 이 밭에 쌓은 돌들이라고 봐도 무리가 없다.

이렇듯 귀한 밭담이고, 최근엔 국제사회로부터 인류의 유산이라 인정도 받았지만 현대에 와선 제주도가 개발로 몸살을 앓으면서 곳곳의 밭담이 위험에 노출돼 있다. 밭담을 보존하는 방법은 사실 간단하기 그지없다. 밭담은 제주 농경의 역사를 처음부터 함께한 농업시설이다. 농촌과 농지가 생명을 잃지 않는 한 언제까지고 자리를 지킬 것이다. 밭담은 앞으로도 제주 농업이 살아있다는 증거로 꿋꿋하게 서 있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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