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주산④ 머릿속에다 주판을 담으라고?

  • 입력 2018.10.06 15:13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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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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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가 칠판의 분필가루받이에 커다란 주판을 올려놓고 학생들을 가르친다. 그 교육용 주판을 ‘대주판’이라 했다. 주판알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뀀대가 솔 모양으로 만들어졌으나, 이 교실 저 교실로 옮겨 다니면서 몇 년을 사용하다보면 헐거워져서, 올려놓은 주판알이 제 풀에 미끄러지기도 했고, 그 바람에 교사가 계산해 놓은 답이 틀려서 학생들의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다.

주산에서 가장 흥미로운 과목은 암산이다. 암산에는 인쇄된 숫자를 보고 주판 없이 셈을 하는 독산암산과 불러주는 수를 듣고 머릿속에서 계산을 하는 호산암산이 있다. 초등학교 때 선생님은 독산암산을 신속하게 하려면 별도로 ‘암산 구구단’을 외워야 한다고 했다.

“우선 세 개의 수를 합해서 20이 되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암산 구구단 2단은 299(이구구) 하나밖에 없다. 그 다음에 3단은 389(삼팔구)하고 398이고 4단은 479, 488, 497이고 5단은 569, 578, 587, 596…. 이런 식으로 셋을 합해 20이 되는 수를 외워놓으면 신속하게 계산을 할 수 있다. 집에 가서 느그 아부지들한테 여쭤봐라. 빠삭하게 알고 계실 거야. 어른들이 화투 칠 때 ‘389 짓고 일곱 끝!’ 하는 소리 안 들어봤어?”

“선생님, 저도 그 ‘짓고 땡’ 알아요. 사륙장 짓고 5땡!”

“뭐야, 이놈아!”(학생들 폭소)

그런데 불러주는 수를 듣고 계산하는 호산암산의 경우 ‘연상계산법’이라는, 매우 어려운 과정의 수련이 필요했다. 담당 교사는 이렇게 말했다.

“눈을 감고 머릿속에다 주판을 그려봐라. 자, 연상된 주판을 잘 살펴봐라. 세 자리마다 검은 자릿점이 찍혀 있는 것 보이지? 지금부터 선생님이 부르는 숫자를 그 상상 속의 주판에다 놓아서 계산을 하는 거야. 그럼 머릿속 주판에서 떨고, 놓기를! 25원이요, 38원이요, 49원이요, 91원이요, 50원이요, 73원이요, 88원이요, 62원이면!”

“4,476원이오!”

“정산이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봐라. 조금 전 선생님이 부른 숫자를 머릿속의 주판 알맹이를 움직여서 계산한 것이 아니고, 그냥 더하기를 한 거지? 내가 다 안다. 솔직히 말하면 선생님도 처음 배울 때 그렇게 했거든.”

머릿속에다 주판의 모양을 연상하고서, 부르는 숫자를 상상속의 주판에다 놓아 계산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꾸준한 훈련과정을 거쳐 숙달된 경지에 이르면 오히려 실제로 주판에다 셈하는 것 보다 더욱 신속한 계산을 해낼 수 있다.

보통 초단 이상의 실력이 되면 꽤 여러 자리의 수를, 아무리 빠른 속도로 불러도 거침없이 계산을 해냈는데, 주산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가장 경이롭게 여기는 것이 바로 그 암산능력이다.

그러니까 암산 과목이 등장하는, 3급 이상의 과정을 배우는 단계에 이르면, 학생들은 아무 데서나 습관적으로 오른손의 손가락을 움직거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바로 이 연상계산 훈련에서 비롯된 버릇이다. 한창 피아노를 배우는 어린 아이가 식탁이나 책상에서도 손가락을 움직거리는 버릇을 가지고 있듯이.

거리에서 주산학원이 모두 사라진 뒤에 ‘속셈학원’이라는 이름의 교습소가 등장했는데(요즘도 그런 간판을 본 것 같다), 바로 이 ‘속셈’이 본래는 주산의 호산암산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물론 초기에는 수학(산수)을 가르치는 학원이었으나 나중엔 초·중생에게 학과공부를 가르치는 교습소들을 뭉뚱그려서 그냥 속셈학원이라 했다.

상업고등학교에서 2학기말이 되면 가장 분주해지는 사람이 바로 취업담당 교사였다. 웬만한 규모의 회사에서는 대개 학교의 추천을 받아 경리직원을 뽑았는데, 자격 요건 중에서 빠지지 않은 것이 바로 ‘주산 ○급(단) 이상’이었다. 그렇게 입사한 졸업생들이 ○○물산, ○○상사 등의 경리담당으로 취직을 해서 개발연대의 산업역군으로 한국경제를 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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