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농경사회 사람들] 좌분선 우늠이 ②

  • 입력 2018.10.06 20:21
  • 기자명 이중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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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기 시인

지금이야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가 아니라 개가 풀 뜯어먹는 소리쯤으로 치부될 일이지만, ‘이승복 신화’ 속에서 국민교육헌장을 달달 외워야만 했던 시절까지만 해도 불혹 가까운 남자가 아들을 두지 못했다면 그 집안에 드리운 근심은 여간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쥐뿔도 없는 주제에 걸핏하면 가문을 들먹이며 ‘양반’ 자랑을 늘어놓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맏이가 딸만 내리 낳으면 어미 되는 입장인 사람이 동네 마당에다 대놓고 저 늠의 자슥이 또 도끼질 해버렸다며 한탄했을까. 대 이을 아들을 낳지 못하면 ‘죄악’으로 여긴 시대였다.

이재후 씨가 그랬다. 내리 둘을 딸만 낳았다. 그런데 암만 기다려도 셋째가 태어날 징후를 보여주지 않자 기어이 어른들이 나섰다. 니 우얄끼고? 숫기 없는 아들이 어미 앞에 무슨 할 말이 있었겠는가. 니 정말로 가시나 둘로 끝낼끼가? 늙은 어미 추궁 앞에 불혹 아들이야 무슨 면목이 있으랴. 오늘부터 아 어마이는 내가 델꼬 잘끼다. 그래 알어라.

어떻게 며느리를 회유하고 설득했는지는 모를 일이다. 니는 마 내캉 살자. 그렇게 시어미가 며느리를 사랑채로 데려간 뒤 이재후 씨는 꼬박 한 달을 독수공방으로 지내다가 새 장가를 들었다. 살림난 듯 두 고부는 사랑채에서 먹고 잤다. 이른 아침을 먹고 챙겨간 밥으로 들에서 점심을 때웠다. 안채 부엌으로는 걸음도 하지 않았다.

사랑채로 밀려난 큰댁은 한 달이 훨씬 지나서야 그네가 벙어리라는 사실을 알았다. 시집온 지 20년이 가깝도록 아들을 낳지 못한 죄 때문에 입도 벙긋 못해본 신세였지만, 밤마다 본채 저쪽으로 귀를 곧추세우며 속을 끓여야했다. 야비한 내침이었다. 당장이라도 뛰어가 그 두 사람 사이에 벌렁 드러눕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걸 못한다면 차라리 소리 소문 없이 집밖으로 나가 흔적을 지워버리고 싶었다. 하룻밤에도 열 번이나 죽는 꿈을 꾸다가 깨어나곤 했다. 그때마다 시어미 말소리가 가슴패기를 팠다. 야가 안 자고 와이카노, 내일 밭일이 얼만데.

욕된 날들이 지나가면서 가슴 속 파문이 잦아져갔다. 욕망의 문에 빗장을 지르자 새로운 희망이 보였다. 팔을 걷어붙였다. 시어미가 시키지 않았더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앞니 꼭 물고 큰댁은 작은댁 아이를 받았다. 고추였다. 그걸 확인하는 순간 내침당한 지난 일 년간의 설움은 씻은 듯 사라지고 없었다. 밤마다 그 아들을 끼고 잤다. 두 번째 아들도 손수 받았다. 여한이 없었다. 손 안의 구슬처럼 키웠다. 그 뒤로 태어난 두 딸아이는 돌아보지도 않았다. 아들 둘만 내 자식이었다. 두 아들에게 젖을 물리는 시간 외에는 작은댁이 손도 못 대게 했다. 작은댁 벙어리의 설움이야 알바 아니었다.

큰댁 작은댁이 가까워지기 시작한 게 언제부터였는지 누구도 알지 못한다. 시집온 지 두어 달 무렵에야 벙어리 작은댁이 사랑으로 밥상을 날라 왔고, 큰아이 해산 후부터는 으으어, 무어라 소리치며 큰댁 소매를 잡아 안채로 이끌었지만 애써 뿌리쳤다. 그렇게 살았다. 시어미 떠나고부터였을 것이다. 그 무렵에 이재후 씨는 사랑채로 내려오고 큰댁이 안방으로 올라갔다. 더 이상 벙어리 손을 뿌리칠 수 없었다. 십년이 훌쩍 지나 돌아온 안방에서 큰댁은 벙어리 여자와 나란히 누워 잠들었다. 끼니때마다 영감은 윗목의 독상에 외떨어져 앉았고, 큰댁과 작은댁이 한 상에 마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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