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력하면 … 죽어라 노력하면 되는 거야”

사람 사는 이야기 이 사람 ㅣ 해남 여성농민 오분임씨

  • 입력 2018.09.22 16:28
  • 기자명 심증식 편집국장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전남 해남군 현산면 오분임씨를 찾았다. 올해 여든을 넘긴 세대의 사람들치고 인생역전이 파란만장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이들은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그리고 가난 군사독재로 이어지는 지난한 현대사를 온몸으로 겪어왔다. 오분임씨의 인생이 곧 우리 현대사이다.

“6살 때 우리 아버지가 일본놈들에게 끌려갔어. 일본순사가 하얀 옷 입고 칼 차고 돌아다녔는데 사람들 모두 일본놈들 무서워했어. 그런데 어린 맘에 우리 아버지 끌고 간 사람이 누군가 하고 따라다니고, 일본순사가 지나가면 담벼락 넘어서 쳐다보기도 했지. 엄마가 따라다니지 말라고 했는데도.” 오씨는 일제의 강제동원 피해자 가족이다. 6살 때 아버지가 일제의 강제동원에 끌려갔다. 가장이 없는 집에서 어머니는 어린 애들을 혼자 키우기가 힘겨웠다. 그래서 친정 동네로 이사를 했다.

“아버지 끌려가고 나서 살기가 힘드니까 우리 엄마가 외갓집으로 가자해서 외갓집인 북평면 오산리에서 신평리로 갔어.” 그러고 얼마 안 있어 아버지가 돌아왔다. “아버지는 끌려가서 3년 만에 돌아오셨는데 몸을 많이 다쳐 장애를 입고 오셨어. 오셔서는 얼마 못사시고 돌아가셨지.”

그 당시 일제의 강제동원에 끌려갔던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오씨의 아버지도 고된 노동과 학대로 몸이 망가질 대로 망가진 것이다. 이런 지경이 돼 쓸모가 없게 되자 집으로 돌려보낸 것이다. 일제의 강제동원으로 아버지를 잃게 되면서 오씨 가족은 해체되고 삶은 비참해졌다. 그래서 아버지의 불행한 죽음은 오씨에게 잊을 수 없는 한이 됐다.

외갓집 동네로 왔다고 사는 것이 나아질 리가 없었다. 입이라도 줄여야 하는 곤궁한 처지에서 오씨는 막내이모집 양녀로 들어갔다. “어릴 때니까 이모가 뭐준다고 하니까 따라 간 거지.” 이모네는 완도 군외면 어촌이었다. 그 곳에서 오씨는 김을 하고, 미역 매는 일을 하면 지냈다. “지금 사람들은 김 하면 뭐 힘드냐 하는데 옛날에는 힘들었어. 잘해야 100장 쳤으니까.”

이모네에서는 13살부터 21살 결혼할 때까지 안 해본 일 없이 열심히 일을 하며 지냈다고 한다. “김 하고, 미역 엮고, 낙지, 주꾸미 잡고 청각 따고 우뭇가사리 매고, 지게질도 했어.” 어촌에서 하는 일은 가리지 않고 다하며 살아왔다. 오씨는 “노력하면 죽어라 하면 되는거야”라는 말을 자주 했다. “노력하면 죽어라 하면 되는거야”는 오씨 삶의 좌우명이고 오씨를 지탱해온 신앙과도 같은 말이었다.

평범한 여성농민이지만 한국 근현대사의 산증인이라 할 수 있는 오분임씨가 황금빛으로 익어가는 들녘을 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다.
평범한 여성농민이지만 한국 근현대사의 산증인이라 할 수 있는 오분임씨가 황금빛으로 익어가는 들녘을 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다.

‘새야 집지어라 꽁아꽁아 밥지어라’

21살이 되자 둘째이모의 중매로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다. “시부모 있으면 고생하는데, 시부모도 안계시고 시아재도 일본에 있고 해서 혼자니까 시집살이 안할 거라고.” 어른들의 중매로 결혼을 하게 됐지만 결혼하는 날 신랑을 처음 봤다고 했다. 신랑 역시 가진 것 없는 혈혈단신이었다. 신접살림은 둘째 이모집 행랑채에 셋방살이로 시작했다. “그 때는 지금과 달라서 시골에도 셋방살이 하는 사람이 많았어.”

결혼해서는 농사를 지었다. 남의 땅이지만 벼농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만 해서는 살아가기 어려웠다. 하루 빨리 셋방에서 벗어나 내 집을 마련해야 했다. “여기 큰 저수지가 있어서 새우, 붕어, 가물치 잡으러 다녔어.” 날마다 새벽 3시에 일어나 아침밥 먹고 저수지로 나갔다.

이모집 행랑채에 3년 살다가 헌집을 뜯은 나무를 구해서 집을 짓기 시작했다. “새 나무를 살 수 없으니까 사진관 뜯은 나무를 얻어서 집을 지었어. 낮에는 일하고 밤에 둘이서 집을 지었지. 우선 방부터 들이고 부엌 만들고 하는 식으로 했지.” 이렇게 해서 오씨는 내 집을 마련했다.

‘새야새야 집지어라 꽁아꽁아 밥지어’하는 동요처럼 그렇게 두 내외는 집을 지어 삶의 터전을 마련했다. “난 지금도 이 집이 좋아. 아파트보다 훨씬 좋아.” 오씨의 집은 두 내외의 땀과 꿈으로 쌓아 올린 것일 테다. 그러니 애틋할 수밖에 없다.

“돼지도 키웠는데 남들보다 더 노력해서 쑥쑥 잘 컸어. 노력하면 하는 대로 잘 돼 그래서 땅도 사고.” 성실하게 노력해서 논을 18마지기까지 장만했다.

아버지의 한 풀고자 유족회 활동

오씨는 50세에 남편을 먼저 보냈다. 농약중독으로 일찍 세상을 뜬 것이다. 이때부터 오씨는 아들을 서울로 올려 보내고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그것은 어려서부터 가슴에 품고 있던 일이었다. 일제 강제징용 나갔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한을 풀어드리는 것이다.

강제동원 유족단체에 들어가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위안부·징용 피해자 등 일제 강점기에 강제동원된 피해자들이 모여 일본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했다. “열흘에 한 번씩 일본대사관에 찾아가서 싸웠어. 한 풀고 편안히 살겠다고.” 일제 강제동원은 당사자뿐 아니라 가족들에게도 일생의 고통을 안겨줬다. 그래서 그들이 모여 일본의 사과와 피해 보상을 촉구했던 것이다.

오씨는 항상 앞장서서 격렬히 싸웠다. “일본대사관 앞에 가서 우리 아버지 살려내라, 일본은 사과하고 피해 보상하라 악을 악을 쓰며 싸웠지.” 오씨는 유족회 회원 중에서도 싸움꾼으로 이름이 날 정도였다. “내가 가면 경찰들이 전라도 엄마 왔다고 알아보고 대사관 쪽으로 오지 못하게 했어. 그래서 옷을 뒤집어 입고 경찰을 속이고 들어간 적도 있어.”

그 뿐 아니었다.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문제의 근원은 1965년 한일협정이다. 당시 일본정부는 식민지 수탈을 공식 시인하지도 않았고, 특히 민간인 피해에 대해 어떠한 보상도 하지 않는 굴욕적 협정을 체결했다. 1964년 이에 항의하는 대규모시위가 일어났고 급기야 박정희 정권은 6월 3일 비상계엄을 선포하게 된다. 그 협상은 당시 중앙정보부장인 김종필과 일본의 오히라 마사요시 외상간의 비밀협상으로 진행됐다.

유족단체들은 한일굴욕협정의 당사자인 김종필의 집으로도 찾아갔다. 일본대사관 집회를 마치고 유족단체 회원들은 버스를 타고 고속도로로 향했다. 만남의 광장에서 잠시 쉬면서 경찰에게는 이제 해남으로 돌아간다고 해 경찰을 따돌리고 차를 돌렸다.

그리고 다시 서울로 향했다. 청구동 김종필의 집으로 가기로 한 것이다. “종필이 저놈이 한일회담에 무조건 일본놈들 하자는 대로 대해줘서 이렇게 된 거잖아. 김종필 집에 가서 네놈이 다 죽인 거다 나와라 하며 소리치고 대문을 발로 차고 했어. 경찰은 처음에는 기물파손으로 처벌한다고 하더니 우리가 더 세게 나가니까 나중에는 원 풀릴 때까지 하라고 했어.”

오분임씨가 온 몸으로 겪어온 지난날을 이야기 하고 있다.
오분임씨가 온 몸으로 겪어온 지난날을 이야기 하고 있다.

농민회 건설에 앞장서다

유족회 활동을 하면서 오씨는 세상에 대해 눈을 뜨게 됐다. 그래서 농민회 활동에 참여하게 됐다. 당시 농민회는 수세문제로 싸우고 있었다. “일 년 농사져서 농지세 물고 수세 물고 하는데 그렇게 나락 나간 놈 쌓아 놓으면 우리 지붕만큼 나간 거 같아.” 그 당시에는 논농사를 지면 수세와 농지세를 내야 했다. 1980년대 초기 농민운동은 농지세 폐지 운동 그리고 수세 폐지 운동을 통해서 농민들의 지지를 얻고 있었다.

오씨는 여성농민이었지만 해남농민회를 만드는 과정에 함께 했으며 농민회 활동에도 열성적이었다. “여자는 나 혼자였는데 차차 다니다 보니 젊은 사람들이 나오고, 부인들도 나오고, 내가 나이가 젤 많지만, 제일 열심히 다녔어. 50이 넘어서 못할게 뭐 있나.”

오씨는 남편을 잃고 혼자되면서 농사도 남 주고 대외활동에 전념했다. “농민회 모임하면 참여하고, 면단위 조직 한다하면 같이 협조하고.” 여성농민으로써는 드물게 농민회 건설에 앞장섰다. 이러한 열성적인 활동으로 오씨에 대한 농민회의 신뢰는 두터웠다. 면단위 농민회가 창립하게 되면 오씨를 항상 초대했다. “면 농민회 총회하면 항상 갔지. 나 같은 사람을 소개해서 단상 올라가면 박수소리가 쩌렁쩌렁 했어.”

1990년 지금으로서는 어이없는 사건이 있었다. 전국농민회총연맹에서는 1990년 11월 16일부터 2박3일간 경희대에서 농민과 서울시민이 만나는 추수대동제를 개최하기로 했다. 전국의 농민회원들이 생산한 농산물 직판과 대동놀이를 통해 농민과 도시민이 하나가 돼 외국농축산물 수입 등으로 죽어가는 농촌을 회생시키는 길을 모색하는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그러나 경찰은 주최단체가 집회 전력이 있다는 이유로 행사를 원천 봉쇄했다. 지역에서 추수대동제에 참여하기 위해 농산물을 싣고 상경하는 차량과 농민들을 대대적으로 연행했다.

해남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때 오씨 역시 경찰에 연행됐다. “추수대동제에 못 가게 막아서 군청에 쳐들어갔어. 여농 총무가 품에 신나 병을 품고 있었는데 몸싸움 중에 그게 떨어져서 탁자가 깨졌어. 그것 때문에 경찰에 잡혀갔지.” 경찰에 연행돼서도 오씨는 굴하지 않고 싸웠다.

“조사를 받으라는데 내가 뭐가 잘못해서 조사를 받냐고 소리치고 철창 발로 차고 하면서 매일 소란을 부렸지.” 이때 마침 군에 간 둘째 아들이 휴가를 나왔다. “처음 조사 받는 날 둘째가 휴가를 나와서 면회를 왔어. 지금까지 농민 위해 살아왔는데 뭘 잘못했다고 가두냐 소리치고 울면서 아들을 만났어.”

추수대동제에 대한 부당한 탄압에 해남농민회의 싸움은 경찰서 안팎에서 연일 계속됐다. 결국 경찰은 풀어주려고 했다. “나가라 하는데 그냥 나오면 서울 가져가려고 준비했던 농산물을 다 물어줘야 하니까 보상 안 해주면 못 나간다고 버텼지.” 연행 당시 농산물도 모두 압수되면서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농산물 직판을 위해 가지고 나온 농민들의 피해가 적지 않았다. “열흘이 지나 군에서 보상해주기로 합의하고 나왔지.”

오씨는 농민회 활동을 하면서 만난 여성농민들과 함께 해남군여성농민회를 조직하고 회장을 맡아 활동했다. “해남여성농민회 만들어서 회장 10년 했고, 도여농 회장도 내가 제일 오래 했을 거야. 7년을 했으니까.” 그녀는 전라남도 농민운동 그리고 여성농민운동의 역사였다. “국회에 가서 싸우고 농협중앙회에 가서도 싸우고 도청에도 쳐들어가고.”

오씨는 농민들을 위한 활동에 빠지지 않고 참여하고 함께 했다. 팔순이 넘은 지금도 여성농민회 활동은 두 말 않고 나선다. “세상 돌아가는 거 계속 보고 있어. 그전만큼은 못해도 여농 행사에는 가려고.”

저작권자 © 한국농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