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주산③ 호산(呼算) - 듣고 놓기
[그 시절 우리는] 주산③ 호산(呼算) - 듣고 놓기
  • 이상락 소설가
  • 승인 2018.09.22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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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이상락 소설가

1955년, 중학 졸업을 앞둔 홍진기는 당시 초등학교 교장이던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서울로 올라가서 덕수상고에 진학하게 되는데, 당시만 해도 신입생의 90%는 같은 울타리 안에 있던 덕수 중학교 졸업생들이었다. 지방 출신 학생들은 소수에 불과했다. 드디어 첫 주산 수업시간이 돌아왔다.

“나는 너희들의 주산을 담당할 선생님이다. 상업고등학교에서 주산이 얼마나 중요한 과목인가 하는 것은 이미 들어서 알고 있을 것이다. 주판 안 가져온 사람 앞으로 나와!”

꽤 여러 명의 아이들이 앞으로 나갔다.

“상업학교 학생이 주판을 안 갖고 학교에 오는 것은, 군인이 총을 빠뜨리고 전쟁터에 가는 것하고 같은 거야! 하지만 선생님은 마음씨가 좋아서 절대로 매를 때리지는 않는다. 6.25 동란으로 여기저기 도로가 파괴돼서 걱정인데, 이참에 너희들의 머리에다 신작로를 내 주겠다.”

주산을 배웠던 사람이면 누구나 몇 번씩은 당해보았을 독특한 체벌이었다. 당시만 해도 고등학생들은 삭발을 하고 다녔기 때문에 선생님이 손에 쥔 주판의 알맹이가 드드득, 미끄럼을 타며 지나고 나면 빡빡머리에서 불이 난 듯 화끈거렸다.

“자, 그럼 지금부터 너희들의 주산실력을 테스트하기 위해서 호산을 하겠다. 떨고, 놓기를!”

호산(呼算)은 불러주는 수를 듣고 주판에 놓아 셈을 하는 것이며, 독산(讀算)은 인쇄된 수를 보고 읽으면서 하는 계산이다. ‘떨고'라는 명령이 떨어지면 학생들은 연습을 중단하고 주판을 기울여서 모든 알맹이를 아래쪽으로 떨어뜨린다. ‘놓기를’이라는 구령은, 검지로 주욱 그어서 가름대 위의 오주(5珠) 짜리 주판알을 올림으로써 주판 위의 상황을 제로상태로 만들라는 명령이다. 그러니까 호산은 언제나 ‘떨고, 놓기를!’이라는 구령과 함께 시작된다.

“2,456원이요, 3,019원이요, 785원이요, 6,978원이요, 9,016원이요, 5,541원이요, 빼기를 8,432원이요, 넣기를 7,018원이요, 269원이요, 14,075원이면!”

그런데 이런 식의 ‘숫자 부르기’는 한참 뒤의 방식이다. 아마도 홍진기 학생이 덕수상고에 진학했던 1950년대의 경우 화폐개혁 이전이었기 때문에 가령 “700환 20전이요, 450환 60전이요…” 이렇게 불렀을 것이다. 선생님이 맨 마지막 숫자를 “…이면!”이라고 부르기를 마치면 자신 있게 받아놓은 학생들이 저마다 손을 든다. 지명 당한 학생이 말하는 숫자가 자신이 셈한 답과 같으면 학생들이 “정산(正算)!”이라고 합창을 한다. 나중에는 그 두 글자도 귀찮아서 그냥 “정(正)!”이라고 했다.

교사가 부르는 수를 미처 받아놓지 못했거나 도중에 계산이 잘못됐더라도 호산 중에 주판을 떨어버리거나 흔들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 정답을 내지 못하더라도 일단 끝까지 듣고 계산을 해야 하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하교 길 소나기가 쏟아졌다. 하숙집으로 돌아온 홍진기 학생은 주산 숙제를 하려고 주판을 꺼냈는데 문제가 생겼다. 주판에 습기가 차서 알맹이가 잘 오르내리지 않고 뻑뻑하다. 그때 하숙집 아주머니가 나섰다.

“내가 주산 숙제를 못 하고 쩔쩔 매고 있는데, 상고생들 대상으로 5년째 하숙을 쳐왔다는 주인아주머니가 씨익, 웃으면서 뭐란 줄 아세요? ‘주판도 쌀밥을 먹어야 기운 차려서 일을 하는 거야’, 그러시더니….”

하숙집 여주인은 습기 찬 주판을 광으로 가져가서는, 쌀독에 박아 넣고서 몇 번 문질렀다 꺼냈다. 거짓말 같이 주판알이 매끄럽게 움직였다. 미세한 쌀겨가 주판알과 뀀대 사이에 스며들어 알맹이를 매끄럽게 움직이게 하는 요술을 부린 것이다. 그렇다면 가령 학교에서 주산시험을 보던 중에 특정 주판알이 잘 움직이지 않으면 어떻게 할까? 응급처지 요령이 있다. 해당 뀀대에 연필심을 문지르면 흑연가루가 묻어서 매끄럽게 움직인다. 초등학교 때 나도 해본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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