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농경사회 사람들] 좌분선 우늠이①
[내가 만난 농경사회 사람들] 좌분선 우늠이①
  • 이중기 시인
  • 승인 2018.09.15 2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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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기 시인

예순 중반이 되도록 이재후 씨는 동네에서 얌전하기로 소문난 사람이었다. 점잖은 게 아니라 그는 깎은 밤처럼 참으로 얌전했다. 숫기라곤 아예 찾아볼 수없는 어른이었다. 평소에는 옆집 아주머니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할 정도로 낯가림이 심했다. 그때만 해도 나이 마흔이면 젊은이들에게 깍듯하게 어른 소리를 받아 잡숫던 시절이었다. 이재후 씨는 마흔 전후에 택호를 부여받아 무슨 댁 무슨 어른으로 불리었던 어른들 막내 세대이기도 했다. 보릿고개를 간신히 넘어온 그 세대 사람들은 아침부터 주막에 앉아 고춧가루 섞어 내놓는 소금 안주로 ‘깡술’에 절어 살았다.

그렇게 얌전한 사람인 이재후 씨 목소리가 마을을 탕탕 울리는 날도 더러는 있었다. 그때는 그가 술에 취한 날이다. 그는 술만 취하면 동네 누구라도 너나들이로 대드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가 술이 취했을 때 일화는 강변의 자갈처럼 헤아릴 수 없다.

비 갠 날 어느 해거름이었다. 갈지자걸음으로 동네 농기계수리점을 불쑥 찾아온 이재후 씨가 그러나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은근하게 말했다.

“정태 이 사람, 직끔 바뿌나? 내가 자네 돈 쫌 벌게 해줄라꼬 일부로 이래 왔다 아이가.”

기름 잔뜩 묻은 장갑으로 이마를 한번 훔친 수리점 젊은 주인이 빙긋이 웃으며 되물었다.

“와요, 죽전어른 집까지 태워다 드리끼요?”

“아이다. 쩌으기, 뒷고개 밑에 어떤 늠인지는 몰라도 개, 갱운기 한 대를 내삐러 났드라. 그거, 물건 하나는 갠찬으 보이드라. 마 자네가 끌고 와가 팔어 무뿌라. 으야, 알었제?”

표정 한번 굳어지는 일없이 온 얼굴에 웃음을 머금은 수리점 주인이 고개를 꾸벅했다.

“예, 고맙심더. 인자 고마 집에 가보이소.”

휘적휘적, 죽전어른이 걸어간 뒤 농기계수리점 주인은 트럭를 몰아 뒷고개 밑으로 가보니 길가 도랑에 뒤집어져 있는 경운기가 하나 있었다. 그건 틀림없는 이재후 씨 경운기였다. 그는 오래 전부터 술이 취해 경운기를 몰다가 혼자 감당할 수 없는 사고가 나면 농기계수리점으로 찾아가 그렇게 엉뚱한 방식으로 수리를 부탁하는 사람이었다.

경운기 사고를 냈다고 해서 이재후 씨가 무조건 수리점으로 달려가는 건 아니다. 만약 사고 자리가 마을 근처라면 온 동네 개들 신경을 날카롭게 만들어버린다. 그때는 주로 겨울이었고 또 다 저문 시간이기도 했다. 경운기 바퀴 하나가 길가 도랑에 빠져버리면 저속으로 기어 변환을 해서 후진으로 빠져나올 궁리는 아예 할 줄 모르고 길바닥에 퍼질러 앉아 고래고함부터 내지른다. 야 이 당나구 자슥들아, 이재후 경운기 사고 났다. 마카 나와 내 경운기 건져내라. 한참이나 그렇게 소리를 쳤는데도 누구 하나 코빼기도 비치지 않으면 집집마다 다니며 대문을 발로 차댄다. 동네 개들이 짖어대면서 시끄러워지면 그제야 사람들이 하나둘 방안에서 마당으로 내려선다. 그때, 이재후 씨와 맞닥뜨린 사람은 대번에 목덜미가 잡혔고, 사정없이 길바닥으로 질질 끌려 나와야만 했다.

이재후 씨가 걸핏하면 빈정거리는 투인 ‘당나구’는 ‘당나귀’로 정씨를 낮잡아 부르는 영천사람들 말버릇이다. 이재후 씨는 정씨들과 언쟁을 하다 격렬해지면 당나귀에서 ‘조랑말’로 비약해버리기도 한다. 연일정씨 집성촌에서 몇 안 되는 타성으로 사는 이재후 씨야 그야말로 개밥에 도토리 같은 존재였다. 어느 누구라고 감히 그 앞에서 눈 한번 치켜뜰 수가 있었겠나. 그러나 이재후 씨가 그렇게 분란을 일으켜도 연일정씨들에게 밉상이 되지 않은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옛날부터 처가와 외가에서는 무슨 짓을 해도 너그럽게 이해를 해주는 관습이 있었는데, 이재후 씨는 바로 정씨집안 외손이라는 제법 쓸 만한 무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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