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주산① 주판 놓던 그 시절 - “떨고 놓기를!”

  • 입력 2018.09.09 13:35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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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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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우리 곡식 값 모두 얼마지요? 보리쌀 두 되하고 찹쌀 한 되, 그리고 메주콩 닷 되….”

“잠깐만, 수판을 가져다 계산을 해봐야지. 보리쌀 한 됫박이 65원이니까 65를 두 번 놓고, 거기다가 찹쌀 값이 280원이라…에, 또 메주콩 닷 되 값을 더하면…다섯 개짜리 알맹이 하나를 내렸으니까 아래 쪽 알맹이 두 개를 떨고…그럼 이게 얼만가? 단, 십, 백, 천….”

육칠십 년대, 흔히 구경할 수 있던 동네 쌀집 풍경이다. 콧잔등에 돋보기를 무겁게 걸친 주인 할아버지가 큼지막한 주판알을 올렸다 내렸다 하며 쌀값 계산을 하는데 더하고, 빼고, 주판의 가름대를 짚어가며 자릿수를 헤아리고…하는 할아버지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었다.

어디 쌀집뿐이었을까? 연탄가게나 생선가게는 물론, 노상에 좌판을 벌이고 물건을 파는 노점상들도 늘상 주판을 끼고 살았다. 그 시커먼 알맹이의 큼지막한 주판은 쌀가게 주인이 주로 사용했다 해서 속칭 ‘쌀집주판’으로 통했다.

거기 견주어 회사의 경리직원이 사용하던 시무용 주판은 각각의 알맹이가 훨씬 작고 대개 주황색이었으며(흰색도 있긴 했다) 자릿수도 천, 백만, 십억, 조…그 한참 너머까지 세상 모든 단위의 수를 다 놓아도 될 만큼 넉넉하게 길었다.

사무실의 책상이나 캐비닛에는 검은 표지에 끝부분의 단면을 빨갛게 물들인 경리장부들이 꽂혀 있고, 직원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누구나 주산에 능숙했다. 80년대 말까지만 해도 타자 소리와 주판 놓는 소리가 근무 중인 회사 사무실의 상징적인 효과음이었다.

그러나 주산 솜씨가 정말로 뛰어났던 사람들은 뭐니 뭐니 해도 은행직원들이었다. 예금통장에 입금액이나 출금액을 기재하고, 번개 같은 손놀림으로 주판알을 움직여 순식간에 계산을 끝내는 그들의 솜씨는 지켜보는 사람들의 탄성을 자아내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그 시절엔 가계나 기업이나 공공기관의 모든 회계가 주산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랬는데, 1990년대 들어서 그 구실을 전자계산기나 컴퓨터에 내주기 시작한 주판은, 이제는 거짓말같이 우리들의 생활 주변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나는 주산과 관련하여 꽤 기이한 경험을 했다. 국민학교 4학년 때 당당히 주산3급의 자격시험에 합격했다. 주산3급을 우습게 봐서는 안 된다. 2급과는 별 차이가 없지만 4급과는 차원이 다르다. 3급부터는 소수점이 들어간 단위의 수를 더하고 빼고 곱하고 나누는 셈을 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암산도 해야 하고, 왼손으로 전표를 넘기면서 오른손으로 주판을 놓는 전표산도 합격을 해야 한다.

물론 60년대 당시엔 온통 주산 교육 붐이 일었으므로 나보다 훨씬 어린 나이에 1급이나 심지어는 단을 딴 아이들도 전국엔 즐비했다. 그러나 도회지 아이들 얘기다. 내가 나고 자란 남해안 낙도의 섬마을에서는 '쌀집주판' 외엔 변변한 주판을 구경조차 못 했다. 4학년 때 문제의 그 선생님이 우리 학교에 전근을 오기 이전까지는.

좀 특별하게도 상업고등학교(광주상고)를 나와 상대(전남대)를 졸업하고 초등학교 교사가 된 그 선생님은 우리 학교가 초임지라 했는데, 부임한 지 열흘쯤 지난 어느 날 나를 포함하여 일곱 명의 아이들을 불러 세우더니 말했다.

“너희들은 내일부터 다른 애들보다 한 시간 일찍 나오고, 수업 마치고 한 시간 더 늦게 집에 가야 한다. 하루에 두 시간씩 나하고 특별한 공부를 할 것이다. 그것이 뭐냐 하면 주산이다. 이미 너희 아부지들한테 다 허락을 받았다.”

그래서 팔자에 없던 주산공부를 하게 된 것이다. 난 주산이 싫었다. 무엇보다 재미가 없었다. 뒷날 다른 아이들은 그 때 배운 실력을 밑천 삼아 상업학교에도 진학하고 은행에도 취직했지만 난 국민학교 졸업 후에 주판을 내다버렸다. 무엇보다 주산3급으로 계산해야 할 그 무엇을 찾을 수 없었다. 무슨 통장의 이자율 계산할 일도 평생 없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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