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짝 메마른 밭은 열매를 그만큼 내어주지 않았다

  • 입력 2018.08.19 12:05
  • 기자명 한승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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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염에 말라비틀어지고 폭염에 상품가치가 현저히 떨어진 고추가 부지기수였다.
폭염에 말라비틀어지고 상품가치가 현저히 떨어진 고추가 부지기수였다.
후텁지근한 날씨 탓에 몸을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박씨가 옷소매로 땀을 닦고 있다.
후텁지근한 날씨 탓에 몸을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박씨가 옷소매로 땀을 닦고 있다.
목이 마른 걸까 속이 탄 걸까. 잠시 숨을 돌리는 사이, 정수업 할아버지가 소주 한 컵을 물처럼 들이켰다.
목이 마른 걸까 속이 탄 걸까. 잠시 숨을 돌리는 사이, 정수업 할아버지가 소주 한 컵을 물처럼 들이켰다.
휴식을 취한 농민들이 빈 망을 들고 고추밭으로 들어가고 있다.
휴식을 취한 농민들이 빈 망을 들고 고추밭으로 들어가고 있다.

[한국농정신문 한승호 기자]

13일 현재 우리나라 전국 평균 폭염 일수는 26.1일이었다. 같은 기간 평균 폭염 일수가 가장 많았던 1994년의 25.5일을 이미 넘어섰다. ‘모기도 입이 삐뚤어진다’는 처서(23일)까지 폭염이 지속돼 역대 최장 폭염 일수(31.1일)를 갱신할 가능성이 높다는 기상예보가 이날 뉴스를 통해 흘러나왔다.

그러나 살갗이 따갑도록 내리쬐는 뜨거운 햇볕 아래서 구슬땀을 흘리고 있던 팔순농부에게 올 여름 폭염은 팔십 평생에 처음으로 “해도 해도 너무한” 가뭄과 ‘가마솥’ 더위로 다가왔다. 인근의 천수답 논은 물이 말라 바닥을 드러냈다. 논 옆 고추밭 500여 평엔 수확해야 할 고추가 곳곳에 널려있었다.

다만 제 때 물을 주지 못해 말라비틀어지고 폭염에 병들어 상품가치가 현저히 떨어진 고추가 부지기수였다. 첫물에 따지 못한 고추가 두물에 수확해야 할 고추와 겹쳐 누렇게 마른 가지 사이에 수두룩하게 매달려 있었다.

낮 최고기온이 35도를 넘나들었던 지난 13일 전북 진안군 동향면 해발 400여 미터의 비탈진 밭에서 올해 여든여섯인 정수업 할아버지와 여든하나인 박씨 할머니 등이 고추를 수확하고 있었다. 본인 키만큼 훌쩍 자란 고춧대 사이에 앉거나 서서 박씨는 빨갛게 익은 고추를 골라 땄다. 그러나 따지 않는 고추보다 수확한 고추를 셈하는 게 더 나았다. 한 고랑을 다 따더라도 고추 한 망을 채우는 게 쉽지 않았다.

폭염 속에서 한 시간여 남짓 고추를 수확한 농민들이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다.
고추를 수확하던 농민들이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다.

한 달 보름이 다 되도록 오지 않은 비에 밭은 바짝 메말랐다. 인근 마을보다 고지대였기에 물을 직접 댈만한 수원도 주변엔 없었다. 결국 밭은 열매를 그만큼 내어주지 않았다. 작년에 1,000망 가까이 수확해 효자 노릇을 톡톡히 했던 고추밭이었건만 올해는 사정이 전혀 달랐다.

반의 반 토막, 수확량은 눈에 띄게 줄었다. 문제는 폭염이 지속되면 세물, 네물이 되더라도 이미 마르기 시작한 고춧대에서 양질의 고추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차광막도 없이 햇볕이 그대로 내리쬐는 밭에서 한 시간여 남짓 작업을 이어갔던 노부부와 동네 주민들은 잠시 쉴 참으로 밭 옆 갓길에 걸터앉았다. 젖은 옷으로 땀을 훔치고 페트병에 얼려온 물을 마셨다. 일부는 담배를 피우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씨 할아버지는 종이컵 가득 소주를 부었다. 찰랑찰랑 넘칠 정도로 가득 담긴 소주를 그는 물마시듯 마셔 넘겼다. 안주도 없이 그저 입 한 번 슬쩍 훔치는 것이 다였다. “하늘이 하는 일인데 안 되는 걸 어쩌겠노(정씨).” “참 징글맞게도 소낙비 한 번이 안 오요(박씨).” 노부부는 애써 말을 아꼈다.

“해도 해도 너무한” 폭염으로 들끓는 이번 여름 (그리고 오늘도) 유난히 맑고 시퍼렇던 하늘과 말라비틀어진 고추밭을 번갈아 보며 시커멓게 타들어갔을 노부부의 답답한 속내를 몇 마디의 대화와 표정으로 헤아릴 순 없었다. 보고 들으며 그저 짐작할 뿐이었다.

잠깐의 쉼을 뒤로 하고 이들은 빈 망을 들고 다시 고추밭 사이로 몸을 숨겼다. 여전히 햇볕은 원망스러우리만큼 뜨거웠고 그들의 빈자리엔 오후 내내 수확한 고추가 든 망 네 개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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