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폐결핵③ 기침약 받으러 가던 날

  • 입력 2018.08.19 11:54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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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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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의 5일장 날은 장사꾼들에게 뿐만 아니라, 보건소 의료진에게도 대목 날이었다. 1960년대 당시엔 교통이 지극히 불편했기 때문에, 오지 마을에 사는 환자가 읍내에 있는 보건소까지 찾아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보건소장이 간호사를 대동하고 면소재지에서 열리는 5일장을 찾아 순회 진료를 나갔던 것이다. 당시만 해도 자동차가 대단히 귀한 시절이었지만, 외국의 원조기관에서 지프 한 대씩을 보건소에 기증했기 때문에, 그나마 기동성 있게 움직일 수가 있었다.

“선생님, 오늘은 어디다 점방을 차리지요?”

“으음, 일단 면사무소로 가자. 면장님한테 숙직실이라도 좀 빌려달라고 해서 장사를 해보자.”

지프가 장터 인근에 도착했을 때 보건소장 송선대와 간호사가 나누었던 대화가 이러했다.

간이 진료소를 차리고 나면, 애써 장터에까지 나가 손님을 ‘호객’할 필요까지는 없었다. 장에 나온 사람들 사이에 ‘보건소 차 들어왔다’는 소문이 금세 퍼졌을 터이므로.

오전 10시쯤 되자 양손에 장거리를 나눠 들거나 머리에 인 주민들이 진료소로 몰려들기 시작한다. 그 중엔 5일장에는 용무가 없는데도 순전히 보건소 사람들을 만나려고 아침부터 외출복 차려입고 나들이에 나선 사람들도 있었다.

“회충약 좀 주이소.” “내는 기침약 타러 왔심더….”

보건소 식구들의 일손이 바빠진다.

“간호원, 구충제는 이름만 적은 다음에 지급을 하고, 결핵이 의심되는 분들은 이쪽으로….”

보건소장 앞으로 넘겨진 사람들은 기침을 콜록거리는 결핵이 의심되는 사람들이다.

기침소리가 예사롭지 않다 싶은 사람은 가래를 뱉게 해서 개별로 객담 통에 넣은 뒤에 이름표를 붙인다. 보건소에 있는 엑스선 촬영기를 움직일 수는 없었기 때문에 5일장이 열리는 날, 기침이 심한 사람들로부터 가래를 받아왔다가 현미경으로 관찰한 다음, 그 다음 장날에 가서 결핵감염 여부를 당사자들에게 알려주는 방식이었다. 60년대 당시, 검사를 의뢰했던 사람들 중 3분의 1이 결핵환자 판정을 받았다는 것이 송선대 원장의 얘기다. 그런데, 결핵환자에게 결핵환자라고 알려 주는 일 또한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할아버지, 제 말 잘 들으세요. 할아버지는 결핵이 꽤 심한 편입니다. 지금부터라도 치료를 하셔야 합니다. 이대로 방치하면….”

“택도 없는 소리 말그라. 이래봬도 내가 우리 집 일곱 마지기 농사를 혼자 다 짓는 사람이다. 누구를 폐병쟁이 맹글라고 그라노. 무슨 이런 돌팔이 의사가 다 있노!”

그러나 그렇게 뛰쳐나갔던 사람도 다음 장날이면 더 심한 기침을 달고 다시 찾아와서는 풀죽은 목소리로 치료방법을 묻더라고 했다.

“요즘 사람들이 결핵을 너무 가볍게 생각해서 문제라면, 그 당시 사람들은 또 너무 무겁게 여겨서 탈이었어요. 결핵에 감염됐다는 한 마디에 그처럼 불같이 화를 낸 것도 그것을 저주받은 사람에게 하늘이 내린 괴질쯤으로 여겼던 사회분위기 때문이었지요. 처녀 총각이 결혼을 약속했다가도, 상대편 집안의 친척 중에 결핵환자가 있을 경우 ‘폐병쟁이 집안과는 혼인을 할 수 없다’며 혼사를 파기하는 사례가 흔하게 발생했을 정도였거든요.”

결핵 감염자로 확인되면 보건소로 불러서 엑스레이를 촬영한 다음 치료약을 공급하였는데, 60년대만 해도 환자에게 줄 치료약이 턱없이 모자랐다. 우리나라에서는 결핵 치료약을 개발할 엄두를 내지 못한 상황이라, 외국 원조기관에서 제공한 ‘아이나(INAH)’라는 결핵 항균제를 나눠주는 것이 유일한 치료방법이었다.

그나마 공급이 태부족했다. 그래서 어린이 환자들에게 먼저 약을 복용하게 하고 그 다음으로는, 당장 몸져누우면 농사지을 사람이 없어서 식구들의 생계가 문제 되는 가장에게 여러 날 분의 약을 나눠주는 방식으로 나름의 우선순위를 정해두었다는데, 그 때문에 노인들로부터 호되게 원성을 들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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