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폐결핵② 장돌뱅이 보건소장

  • 입력 2018.08.12 13:03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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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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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가을, 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화전동에 갔다.

‘도리원’이라고도 불리는 이 전형적인 농촌 마을의 들머리에 들어서자 <제남병원>이라는 작은 규모의 의원 하나가 자리하고 있었다. 내가 찾아갔을 때, 그 병원은 수리가 한창이었는데, 농촌 노인들의 질환을 전문적으로 치료하는 진료기관으로 재개원하기 위해서 보수공사를 하는 중이라고 했다. 그 병원의 원장을 새로 맡게 된 송선대 씨는 1960년대 중반에 의사가 된 이후 국립마산결핵병원에서 공무원으로서의 정년을 채우고 물러났다. 평생을 결핵환자와 더불어 살아온, 우리나라 결핵 진료 분야의 살아 있는 역사다.

지금부터 송 원장의 증언을 바탕으로, 결핵이라는 그 몹쓸 전염병이 창궐했던 시대에, 사람들이 그 질병과 어떻게 싸워왔는지, 그리고 그 병마로부터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국가나 의료진은 또 어떤 노력을 해왔는지를 더듬어 보기로 한다.

해방직전인 1944년, 경상도 군위의 한 농촌 마을.

“나, 엄마랑 잘래.”

“안 돼. 엄마는 혼자 있어야 병이 낫는다니까.”

“엄마랑 자고 싶은데….”

“이리 와. 할머니랑 자자.”

방문 돌쩌귀를 붙잡고 있는 사내아이를 할머니는 억지로 떼어내서는 다른 방으로 데려간다.

그리고 며칠 뒤, 꼬마의 어머니는 방바닥에 흥건하게 피를 토해놓고는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 다섯 살짜리 꼬마가 바로 지금의 송선대 제남병원 원장이다.

“난 그저 어머니와 함께 잘 수 없다는 것만이 슬펐을 뿐, 어머니가 폐병을 앓고 있었다는 사실은 한참 뒤에야 알았지요. 결핵을 치료하는 전문의가 된 것은…글쎄요, 운명이지요.”

일제강점기에, 결핵 등의 전염병으로 숨을 거둔 사람의 시신은, 반드시 화장을 해야 한다는 것이 총독부의 지침이었다. 화장시설이 갖춰져 있지 않았으므로 마을 외곽의 빈터에다 장작불을 피워놓고, 절에서 다비식을 하듯이 그렇게 태웠다.

화장에 대한 인식이 요즘과 같지 않았던 시절이라, 사람들은 어떻게든 매장을 하려고 은밀하게 장례를 치르곤 했다. 정식으로 사망신고를 하면, 총독부에서 정한 절차에 따라 화장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송선대는 철도 들기 전에 어머니를 결핵이라는 병마에게 빼앗기고 말았다는데, 정확한 통계는 없으나 해방을 전후한 그 시기에는 결핵에 의한 사망률이 가장 높았을 것이라고 송선대 원장은 말한다.

6.25 전쟁이 터졌다. 그 비참한 전쟁으로 국가경제가 파탄상태에 이른데다, 전쟁의 상처로 인한 심신의 고통까지 더해졌으니, 사람들의 결핵에 대한 저항력이 현저하게 떨어질 것은 불문가지였다. 결핵균이 극성을 부리던 1960년대 중반에 송선대는 의과대학을 졸업한다.

“환자를 치료하는 것은 좋은데 그 대가로 돈을 받아야 한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어요. 의사가 치료행위를 재화와 맞바꾼다? 그게 납득이 안 되더라니까요. 그 시기에 군단위로 보건소들이 세워지고 있었는데 아, 내가 몸담을 곳은 여기다, 했지요.”

송선대는 남들이 꺼리는 보건소 근무를 자원했고, 경상북도 군위보건소 소장으로 첫 발령을 받았다. 그는 찾아오는 환자를 앉아서 기다리지만은 않았다. 가장 바쁜 날은 오일장이 서는 날이다.

“내일은 서보장날이고 모레는 의흥장이고…아, 오늘이 8일이니까 군위장날이네. 간호원, 뭣 하고 있어. 장보러 갈 준비해야지!”

송선대는 객담통(뱉은 가래를 수거하는 통)과 구충제 등속을 챙겨 지프에 싣고서 오일장 터로 향한다. 그는 장돌뱅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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