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폐결핵① 당신의 어깨에 BCG 접종자국이 있습니까

  • 입력 2018.08.03 12:59
  • 수정 2018.08.03 13:42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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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이상락 소설가

형은 꽃가지를 쥔 채 연거푸 기침을 하였다. 나는 형의 손에서 꽃가지를 빼앗아 방 한 구석으로 던졌다. 양 손으로 입을 막았지만 기침은 멎질 않았다. 처음에 나는 형의 손에, 떨어진 화판이 묻어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다. 형의 입에서는 기침할 때마다 화판 같은 피가 흘러나왔다. 어머니가 방안에 들어섰을 땐 지쳐 쓰러져 누워 있었다. 어머니는 아무런 말씀도 않고 피투성이가 된 형의 얼굴과 손을 닦아주고 주변을 훔쳐내었다. 형은 숨 쉬는 것마저 괴로운 모양이었다.

정한숙의 중편소설 ‘어느 소년의 추억’에 나오는 한 장면이다. 일제 강점기, 어머니와 두 어린 아들이 가난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묘사한 이 소설에서, 주인공의 형은 붉은 피를 토하기도 하고, 바튼 숨을 할딱거리기도 하다가 종국에는 고통스럽게 죽어간다. 주인공의 형을 죽음으로 몰고 간 병마는 무엇이었을까? 폐병, 결핵이었다.

1943년, 평양 제1의 극장이었던 금천대좌.

당대를 풍미했던 가수 남인수가 등장하자 극장을 가득 메운 관중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남인수는 특유의 미성으로 ‘애수의 소야곡’을 부르기 시작했다.

운다고 옛사랑이 오리요만은

눈물로 달래보는 구슬픈

이 밤…

그런데 ‘그 밤’은 그야말로 구슬펐다. 노래를 부르던 남인수가 갑자기 무대에서 쓰러진 것이다. 관중들이 아우성을 질렀다. 그의 입에서 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당시 남인수는 폐병을 앓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그는 그 병마를 이기지 못 하고 1962년에 세상을 떠났다.

문헌에 나타난 기록을 기준으로 치자면, 사람이 걸릴 수 있는 병 중에서 가장 오래된 질병이 바로 나병과 결핵일 것이라고 이 분야의 전문가(경북 의성군 ‘제남병원’ 원장)는 얘기한다.

“결핵이라는 말이 처음 쓰인 것은 1800년대에 고흐라는 사람이 결핵균을 발견하면서부터예요. 그 전에는 신의 저주를 받은 질병이라 해서 천형(天刑)이라고도 했고 혹은 기침병, 해소병, 노병, 폐병 이런 말로 불렸지요.”

일제 강점기는 물론이고 해방이 되고나서도 육칠십년 대까지, 결핵환자 한두 명씩 없는 집이 없었다. 그 병은 모질게도 가난한 사람들을 더욱 괴롭히는 재앙과도 같은 질환이었다.

“섭취가 원체 부실해서 영양 상태가 좋지 않은 데다 변변한 의료시설도 없었고, 게다가 전쟁(6.25)까지 치렀으니…거의 무방비 상태에서 결핵이 만연했던 것이지요. 온갖 질병 중에서도 약하고 가난한 사람을 유별나게 더 괴롭히는, 아주 몹쓸 병이었어요.”

1960년대 이전에 출생한 사람이라면 남녀를 불문하고 어깻죽지에, 그 몹쓸 병이 만연하던 시대를 씩씩하게 살아냈다는 증표 하나씩을 훈장처럼 달고 있다. BCG(결핵 예방 백신) 접종 자국이 그것이다. 가족끼리 해운대 해수욕장에 갔는데, 할머니 할아버지는 왜 똑같은 자리에 볼록한 문신을 새겼느냐, 그렇게 따져 묻는 손자 녀석 때문에 난감했다는 친구의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런데 나는 그런 주사 자국이 없다. 그래서 어깻죽지가 아주 매끈하다(아직 손자가 없는 점은 유감이지만).

초등학교 3학년 때던가, 담임선생님이 보건소 직원을 데리고 교실에 나타나서는 그 이름도 매우 어렵고 요상한 무슨 검사를 해야 한다고 했다.

“투베르쿨린 반응검사를 할 것이다. 이 주사를 맞고 나서 주사 맞은 자리가 불그스름하게 10밀리미터 이상 부풀어 오른 놈들은 결핵에 걸린 적이 있거나, 지금 걸려 있는 사람이다!”

이틀 뒤, 대나무 잣대로 자국을 재어본 나는 절망했다. 아, 나는 폐병환자다. 이제 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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