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부장사에서 오미자 농사까지
월부장사에서 오미자 농사까지
  • 심증식 기자
  • 승인 2018.07.22 18: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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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사는 이야기 이 사람] 강원도 철원농민 한현수씨

[한국농정신문 심증식 편집국장]

강원도 철원군 서면 와수리에 사는 한현수씨는 이력이 특이한 농민이다. 올해 나이가 여든인 그는 50년 전 월부장사를 하려고 이곳 철원으로 왔다.

“원래 고향은 경기도 가평이야. 이곳에서 멀지 않은 현리라는 곳에서 월부장사를 했어.” 월부장사는 1960~1970년대에 성행했다. 목돈이 없는 사람들이 살림살이를 장만하기 위해 매달 형편껏 나눠서 돈을 내 물건을 들이는 것이다. 오늘날 할부 판매와 비슷하다. “현리에서 월부장사를 하다가 철원에 군인가족이 많으니까 오게 됐어. 그때가 1967년이니까 50년이 넘었네.”

한씨가 철원에 오게 된 것은 군인가족 그러니까 월급쟁이들이 많은 철원에서 장사가 잘 될 것 같아서다. “판매원을 두고 판매원들이 물건을 팔면 내가 수금을 하러 다녔지. 1967년 첫해 물건을 팔고 수금을 하려는데 1968년도에 김신조 사건이 터져서 수금이 잘 안되더라고.”

1968년 김신조 사건은 서울에서 250리 떨어진 철원의 월부장사 한씨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북한군이 서울 한복판에 침투했으니 전방인 철원은 초비상 상황이 됐고, 접경지역의 긴장감이 높아가니 수금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첫해 어려움은 있었지만 이후 장사는 순조로웠다.

“내가 여기서 이불을 많이 팔았어. 카시미롱, 해피롱 이런 게 많이 나갔어.” 장사로 집도 사고 땅도 장만했다. 그러나 물건을 팔고 수금하는 것은 항상 어려운 일이었다. “군인가족들이 돈을 얼른 주지 않아. 수금하러 가면 자기 하던 일 다 끝날 때까지 기다리게 하고 나서는 돈이 없다고 다음에 오라하기 일쑤였고. 그래서 권태가 나더라고. 그런데 누가 자동차 사업을 소개 했어.”

한현수씨가 월부장사로 시작해서 고추, 오미자 농사까지 이어진 삶의 내력을 담담히 설명하고 있다.
한현수씨가 월부장사로 시작해서 고추, 오미자 농사까지 이어진 삶의 내력을 담담히 설명하고 있다.

월부장사 잘 된다는 말에 철원으로

한씨는 그동안 월부장사로 모은 돈으로 화물차 두 대를 사서 운수업을 시작했다. “한 대는 소개한 사람한테 맡겨 놓고, 한 대는 내가 기사를 데리고 다니면서 일을 했어.” 그러나 운수업은 순탄치 않았다. 사고로 위험한 고비를 넘기기도 하고 같이 하는 사람이 속을 썩이기도 했다.

“물건을 싣고 경기도 오산에 가다가 사고가 났는데 3미터는 붕 떳으려나. 논에 떨어져서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지. 차 한 대를 맡아서 영업을 했던 사람은 춘천에서 일을 했는데 수시로 차가 고장이 났다, 돈을 잃어버렸다 하면서 속이는 거야.” 그리고 점점 일거리가 줄어들었다. “나중에는 짐 실을 게 없어서 동해바다에 가서 해물도 실어다 팔고 했는데… 폭삭 망했어.” 결국 운수업은 실패했다. 운수업 실패로 그동안 월부장사로 벌어 놓은 재산도 모두 날리게 됐다.

‘어깨보증’ 부채 고민하다 농민회 시작

운수업을 접은 한씨는 친척 누님의 논 7,000평을 얻어 농사를 시작했다. “의정부에 사는 집안 누님이 김화에 있는 논을 빌려줬어. 그래서 농사를 시작하게 됐지. 뭐든지 해서 살아가야 하니까.”

농사를 시작하면서 농민회 활동을 하게 된 건 빚 때문이었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 한씨는 보증채무로 인해 신용불량자가 됐다. “보증을 9명 서줬어. 그 사람들이 잘 되면 얼마나 좋겠나 하는 심정으로. 그런데 7명은 잘 됐는데 2명이 어려워져 3,500만원을 가까스로 대신 갚아줬는데, 그래도 1,000만원이 남아서 신용불량자가 됐어.” 1990년대 농촌사회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가 농가부채였다. 1995년 WTO가 출범하면서 농산물 개방은 본격화 된다.

그로 인해 농산물 가격의 폭락이 반복돼 농가경제는 갈수록 어려워지고 농민들은 부채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됐다. 더불어 김영삼정부가 실시한 농어촌구조개선사업으로 이제 너도나도 농사를 계속 짓기 위해서는 기계를 들이고 시설을 해야 하고 농사규모를 늘려야 했다. 부채는 구조적으로 늘어나게 돼 있었다. 결국 농민들 간 소위 말하는 ‘어깨보증’이 일반화 된 것이다. 한씨는 이러한 1990년대 농촌사회 구조적 문제의 피해자 중 한 사람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이 후보시절 농가부채 탕감 해준다고 했잖아. 그 때 서울에서 농민대회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거길 혼자 찾아갔는데 거기서 아들 친구를 만난거야.” 한씨는 이날 농민회 활동을 하고 있는 아들 친구를 우연히 만나면서 농민회에 참여하게 됐다. “그 후로부터 농민회에서 대회나 행사가 있으면 연락이 와서 함께 하게 됐어.” 이렇게 시작한 농민회에서 한씨는 서면 지회장을 맡는 등 열심히 활동했다. “면지회장 할 때 철원 농민주유소를 만들었는데 경제적으로 돈을 벌어야 활동할 수 있다고 김종유 도연맹 의장하고 나하고 우겼어.”

농민주유소는 진주시농민회에서 시작해서 한때 전국적으로 20개소가 운영됐다. 전농의 시·군농민회에서 실시한 대표적 경제협동사업으로 지역의 농업용 면세유 가격을 낮추는 역할과 더불어 농민들의 자발적인 경제협동사업의 모범적 사례였다.

“주유소 차린다고 면지회장은 500만원, 회원은 100만원씩 출자를 하기로 해서 나도 500만원 냈어. 회원들이 주유소에 나와서 바닥포장 공사하고 건물보수도 하고 해서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했지.”

20리 거리 논농사 접고 고추농사 시작

논농사는 집에서 농지까지 거리도 멀고 여건이 좋지 않았다. “논이 여기서 20리가 넘어. 경지정리도 안됐고. 그래서 물대기도 어렵고.” 논에 다니는 것이 이만저만 힘들지 않았다. 더구나 경지정리가 안 된 논이라 물 관리 어려움이 컸다. “여건이 좋지 않아서 수확도 신통치 않았어. 그래서 8년 하다 그만 뒀어.”

논농사를 접은 한씨는 고추농사를 시작했다. “고추모종 1만주를 심었어.” 이때부터 10년 동안 고추를 전업으로 농사지었다. “고추 딸 때가 되면 우리 내외가 매일 같이 나와서 땄어. 고추를 따면 전부 하우스에서 말렸지. 건조기로 많이 말리는 데 건조기로 말리면 맛도 그렇고 색깔도 안 좋아서 우리는 하우스에서 전부 말렸어.”

고추 1만주 약 1,000평을 두 내외가 매달려서 농사를 지었다. 수확철에 매일 고추를 땄고, 전부 태양초로 말렸다. “고추를 한참 많이 딸 때는 하우스가 모자라서 남의 하우스까지 빌려서 말렸지. 그런데 장마철이 문제야. 이틀정도는 괜찮은데 그 이상 비가 오면 엉망이 되는 거지.” 태양초를 만드느라 손이 많이 가고 손실도 많았다. 고추를 수확하면 하우스에 널어서 수시로 뒤집어 주며 관리해야 했고, 비가 며칠씩 오면 썩어서 버리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그래도 한씨는 지금까지 농사 중에 고추농사가 제일 괜찮았다고 한다. “햇볕에 말려서 빛깔도 좋고 맛도 좋아서 소매로 다 팔았어. 서울 사는 친척과 며느리가 전부 팔아줬어. 없어서 못 팔 정도였으니까.” 고추농사는 안정된 소득을 얻게 했다. 많지는 않지만 1년 농사를 하면 1,500만 원 정도 소득이 있었다.

“비용은 거의 안 들어가지. 모두 내손으로 다 하니까. 한 200만원 들어갈까. 우리 내외가 생활하는데 크게 어려움이 없었어.” 그런데 농사일이 힘에 부치기 시작했다. “나이가 드니까 힘이 들어서 고추를 몇 년 전부터 줄이기 시작했어. 5,000주, 4,000주 점점 줄이다가 작년에는 1,000주로 줄였고 그마저도 올해는 뚝 잘랐어.”

소득 작목이라던 오미자, 애물단지로

고추농사가 힘들어지면서 한씨는 다른 편한 농사를 찾았다. 그러던 중에 마침 오미자 심을 사람을 모집하는 현수막을 보게 됐다. “오미자가 소득 작목이라고 권장했어. 150평에 1,000만원 나온다고 신문광고도 하고, 한 번 심으면 15년간 따먹을 수 있다고.” 고추농사에 지쳐있던 그는 오미자 농사에 솔깃했다. 오미자 생산자회 회장이라는 사람이 농사만 잘 지어 놓으면 수매까지 해준다고 했다.

“오미자 생산자 회장을 통해서 모종과 파이프를 사서 첫해에 300평, 다음해 300평 모두 600평을 심었어.” 한씨는 오미자를 심으면서 고추농사를 줄여 나갔다. 그리고 오미자를 수확하기까지 헛고랑에 곰취 모종을 회장한테 사서 심었다.

그런데 오미자 생산자 회장의 말은 전부 거짓이었다. 모종과 자재를 팔아먹고는 나 몰라라 하는 것이다. “완전히 속았어. 생약협회를 통해서 모종을 공급하는 거라고 해서 서울 생약협회에 찾아가 물어 봤는데 모른다고 하더라고. 150평에 1,000만원 소득이 된다는 것도, 수매한다는 것도 전부 거짓말이었어.” 첫해 심은 모종은 작년에 3년차가 돼 본격적으로 수확을 했으나 판로도 마땅치 않고 저장성이 떨어져서 판매한 것이 반품되기도 했다.

“두 내외가 따면 꽤 따겠는데 파는 게 문제야. 아침에 싱싱한 거 땄는데 저녁에는 물러. 택배 보내면 물렀다고 반품이 들어오기도 하고, 수소문해서 팔고 딸이 가져가서 청을 담가서 팔고 해서 겨우 1,000만원 했어.”

80세. 고령의 농민은 좀 더 편한 농사를 찾아 오미자를 심었다. 이때 철원에서 오미자를 심은 농민들은 25명이라고 한다. 이들은 대부분 일흔이 넘은 고령의 농민들이었다. 마땅한 노후대책이 없는 농민들은 편하고 안정된 농사를 찾아 오미자를 심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령의 농민들의 절박한 심정을 이용하는 사기꾼 때문에 낭패를 보고 있다.

그럼에도 누구하나 나서서 그것을 해결하려하지 않고 있어서 한씨는 답답해하고 있다. “강원도 사람들이 순해서 이렇게 속고서도 나서는 사람이 없어. 아무도 안 나서면 나라도 경찰서에 가서 고소를 할 생각이야.”

한씨는 농사를 시작하면서 거의 남의 손을 빌리지 않고 두 내외가 열심히 일을 했다. 지난해에는 오미자 밭에 거름을 줬는데, 15톤차로 5대를 받아서 외발수레로 하루에 100개씩 실어 날라 거름을 줄 정도로 억척스럽게 일을 했다.

논농사도 그랬고 고추농사 역시 그랬다. 고추농사에서 1,500만원 정도 소득을 올렸는데 영농비가 대략 200만원 들어갔다고 하니, 두 내외가 1년 내내 쉬지 않고 일해서 얻은 소득이 1,300만원인 것이다. 이게 오늘 우리 농촌의 현실이다. 나이 여든이 넘어 좀 더 편하게 살자고 시작한 오미자 농사는 이제 애물단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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