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국회 속기사⑥ 속기사, 날치기 현장의 증인들

  • 입력 2018.07.22 18:14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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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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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12월 24일, 야당인 민주당 의원들은 자유당의 국가보안법 개정안 강행처리를 저지하기 위해 본회의장에서 철야농성을 벌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회의장의 문이 열리고 제복을 입은 300명의 경위들이 들이닥쳤다. 사실 그들은 경찰 소속의 무술경관들이었는데 국회경위의 복장으로 위장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야당 의원들 전부 끌어내!”

국회 사무총장의 지시가 떨어지자, 여기저기 고함과 비명 소리가 난무하고…본회의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야당의원 한 사람당 경관 네 명이 달려들어서는 사지를 나눠 잡고 ‘운반하여’ 지하실로 통하는 계단에 ‘내다버렸다’.

야당의원들에 대한 강제퇴거가 끝나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자유당 의원들이 신속하게 본회의장에 입장했다. 경관들이 자유당 의원을 보호하기 위하여 겹겹으로 에워쌌다. 그렇다면 그때 국회 속기사들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었을까? 당시 속기사였던 김진기 씨는 증언한다.

“사무총장이 속기과에 들어오더니 완장과 화판 하나씩을 나눠 주더라고요. 완장을 찬 사람만 회의장에 들여보내 주기로 무술경위들과 약속이 돼 있다는 거예요. 그리고 화판 있지요? 그림 그릴 때 쓰는 화판. 그걸 목에 걸어야 한대요. 어깨엔 완장을 차고, 목에는 사생대회에 나가는 초등학생처럼 회판 하나씩을 메고…웃음밖에 안 나오더라고요.”

그러나 속기사들이 회의장 안에서 했던 일들은 웃어넘길 수 없는 것이었다. 자유당은 보안법 개정안 말고도 이런저런 의안을 덩달아 처리할 준비를 했다. 법안 하나를 의결하려면 해당 상임위원회에서 통과시킨 다음에, 법사위원회를 거쳐서 본회의에 상정하는 게 순서였는데, 의원들이 해당 상임위원회 회의실에 갔다가 다시 오고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본회의장 군데군데에 ‘OO위원회’ 하는 식으로 12개 상임위원회의 명칭을 써 붙여놓고, 몇 걸음을 왔다 갔다 하면서, 국가보안법 개정안을 비롯한 각종 법안들을 무더기로 통과시켰던 것이다. 또한 속기석을 따로 마련할 수 없었기 때문에, 속기사들은 화판에다 종이를 대고 선 채로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기록을 했다.

그런데 국가보안법 개정안을 여당의원들만 참석한 가운데 법사위원회에서 심의를 할 때는 속기 원문을 탈취당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갑자기 나타난 야당의원들 중 한 의원이 ‘날치기 무효!’를 외치며, 속기사가 가지고 있던 해당 속기 원문을 낚아채더니 즉석에서 박박 찢어서 자기 호주머니에 넣어버리는 거예요. 그 속기사는 큰일 났다 싶어서 찢어진 조각이라도 다시 찾으려고 그 의원을 졸졸 따라다녔어요. 흥분한 그 야당 의원은 날치기 통과의 무효를 주장하며 이리저리 돌아다녔는데…그러는 중에 찢어진 속기록 조각이 주머니에서 빠져나오는 것도 모르고 있었어요. 물론 속기사는 그 조각들을 재빨리 주워서 테이프로 이어 붙여 간신히 살려냈지요. 그런 일이 있은 뒤, 그 속기사는 주변 분위기가 이상하다싶으면, 속기록부터 우선 품속에다 감추는 버릇이 생겼다는 겁니다. 그 속기사 이름이 김백곤이었어요.”

국가보안법 개정안이야 그래도 일개 법률안에 불과하지만, 국가의 근간이 되는 헌법 개정안을 그런 식으로 처리한 적도 있었다. 박정희에게 3선의 길을 터주기 위한 이른바 ‘삼선개헌안 날치기 파동’이 그것이었다.

“1969년 9월 14일 저녁, 야당인 신민당 의원들은 본회의장에서 철야농성에 돌입해 있었는데, 한밤중에 공화당 의원들이 본회의장이 아닌 국회 제3별관으로 숨어 들어가서는, 불빛 새나가지 않게 등화관제를 한 다음 헌법 개정안을 뚝딱, 해치웠어요. 물론 그때도 우리 속기사들이 동원되어서 들러리라면 들러리랄까, 증인이라면 증인이랄까, 그런 역할을 했고요, 허허허…. 이런 얘기를 웃으면서 하면 안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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