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바보야, 문제는 가부장문화야

  • 입력 2018.07.15 23:18
  • 수정 2018.07.16 09:12
  • 기자명 구점숙(경남 남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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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점숙(경남 남해)
구점숙(경남 남해)

장마철도 지나고 이제 본격적으로 무더운 여름철이 시작됐습니다. 습하고 무더운 날씨에 제철을 맞은 풀들은 완전 자기들의 세상입니다. 엊그제 깎은 논두렁풀이 고작 하루 이틀이 지났음에도 그 새를 못 참고 속잎이 솟구쳐 오릅니다. 무게가 있는 모든 사물들이 지구중력 때문에 바닥으로 향하는데 유독 식물만큼은 위로 뻗어 나가니 그 태곳적 힘을 사람이 어떻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언덕이 많은 이곳 산골 다랑논 밭두렁의 풀을 깎느라 남편은 아침저녁으로 예초기를 끼고 삽니다. 예초기로 풀을 베면 땀범벅이 되어서 집으로 돌아오곤 합니다. 그럴 때면 좀 짠한 마음도 듭니다. 우리가 얼마나 잘 살려고 이 고생인가 싶은 마음이 살짝 생기는 순간입니다.

그런 남편한테 텃밭까지 손봐달라고 하기가 미안해서 얼마 전에 예초기를 가르쳐달라고 했습니다. 엔진을 켜는 것부터 줄을 가는 법까지 습득을 하고서는 밭으로 갔습니다. 사실 예초기를 들게 된 또 다른 이유는 웬만한 농기계는 같이 하자, 남녀가 유별한 농사일로부터 남녀차별이 시작됐을 것이라는 생각이 있었던 지라 나도 할 수 있다는 것을 과시라도 할 요량이었지요. 게다가 기계로 하는 일은 아무래도 근골격 질환이 덜할 것이라는 생각까지 포함해서요.

막상 해보니 쉽지는 않았습니다. 진동이 계속되니 팔에 힘을 너무 줘서 뻣뻣해지고, 깎아놓은 곳은 쥐가 파먹은 모양새였습니다. 그래도 우쭐거리며 시어머니께 자랑을 했더니, 일을 겁내지 않는 도전의식에는 박수를 보내면서도 다음부터는 하지 말라 하십니다. 남자가 할 일을 같이 하게 되면 서로 미루다가 도맡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오랜 경험에서 나오는 말씀이겠지요.

나는 농기계 다루는 일이 별로 많지 않습니다. 이미 숙련된 남편이 하므로 굳이 내가 나설 이유가 없으니까요. 대신 정교하게 관리해야 되는 농사일이 훨씬 많으므로 거기에 더 많은 시간을 보냅니다.

마을에도 여성농민이 기계를 다루는 농가들이 더러 있습니다. 남편이 다른 업을 가졌다거나 특별히 기계에 눈이 밝은 여성들이 있으니까요. 그런 집에서는 여성농민의 지위가 좀 낫지 않을까? 하는 나름의 생각을 더러 해봤습니다. 웬걸, 그런 집도 크게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지요.

생각해보니 내 생각이 틀렸습니다. 농기계를 잘 다루고 농사일에 대한 기여도가 가정 내의 권력이라 생각했던 것은 커다란 오산이었던 것이지요. 물론 그런 측면이 없잖아 있겠지만 역시나 남성중심의 문화는 훨씬 더 오랜 역사를 밑바탕에 갖고 있었던 터라 누가 얼마큼 일했냐가 우선이 아닌 것입니다.

중요도로 친다면 아이를 낳는 것만큼 큰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아이를 낳는 여성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큰 권력을 지니는 것이 가장 마땅하겠지만 현실은 그러지 못하지요. 그러니 일의 중요도나 기여도로 평가가 되는 것도 아니요, 그렇게 돼서도 안 되는, 그야말로 모든 존재는 어디서나 무슨 일을 하든지 존중하고 존중받으며 민주적으로 살 수 있어야겠지요.

나도 할 수 있다는 치기어린 마음으로 시작한 예초기질로 생각이 여기까지 웃자랐습니다. 무더위에 아침저녁으로 이뤄지는 농사일에서 조화를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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