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농경사회 사람들] 영천읍내 물레방아 나를 안고 돈다
[내가 만난 농경사회 사람들] 영천읍내 물레방아 나를 안고 돈다
  • 이중기 시인
  • 승인 2018.07.15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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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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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로 씨에 대해 얘기하려면 먼저 ‘영천아리랑’부터 말해야 될 것 같다. 이 땅에서 불리고 있는 수많은 아리랑 중에서 영천아리랑이 좀 별난 것이라면 아마도 그 탄생배경이리라. 영천아리랑은 한반도 남녘 땅 영천에서 만들어져 불린 노래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와 30년대에 만주나 연해주로 떠돌아야만 했던 영천사람들이 돌아갈 수 없는 고향을 그리워하며 머나먼 북국에서 지어 부른, 영천에서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노래였다는 것이다. 만주에서 전해지던 것이 북한 연구자들에 의해 복원되었고, 2000년 남북정상회담 만찬장에서 남한 쪽 사람들에게 그 존재가 알려지게 되었다.

몇 년 전 나는 1946년에 일어난 대구 10월항쟁 이틀 후 발생한 영천 10월항쟁을 다룬 장편서사시집「시월」을 펴내면서 그 시집 후기에서 위와 같이 내용을 언급했었다. 1995년부터 내가 채록한 증언들에 의하면 해방 당시 영천사람들 중에 더러는 영천아리랑을 불렀다고 하는데, 북만주에서 돌아온 사람들에 의해서라고 했다. 그런데 해방정국 혼란과 전쟁의 소용돌이를 거치면서 보릿고개를 넘어오는 사이에 그 노래는 구전되지 못하고 사라져버린 것이다. 수십 년이 지난 후에야 그 노래를 북한에서 가지고 온 뒤, 나는 어릴 적 이치로 씨가 자주 흥얼거리던 노래 중 하나가 영천아리랑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치로 씨는 내게 9촌 아저씨였다. 30여 년 전에 세상을 떠난 그가 내 머릿속에 돋을무늬로 각인시켜놓은 일화는 꽤 다양하다. 그는 농사꾼이면서 거의 별로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과 술만 취하면 ‘영천읍내 물레방아 나를 안고 돈다’는 노래를 녹음기처럼 반복했다는 기억 정도에 불과하다. 워낙에 약골이기도 했지만 그는 생에 대한 의욕이 없는 사람이었다. 아내 되는 사람이 잔소리삼아 일일이 일러줘야만 몸을 움직이는 편이니 일머리가 아예 없는 농사꾼이었다. 삽 한 자루 장만해 두지 않은 채 가래만 들고 메고 여름내 들판을 들락거리며 일보다는 노랫가락으로 벼 포기에 힘을 보태느라 바빴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다른 집보다 더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5남매의 맏이인 큰딸이 국민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서울에 사는 먼 일가 판사네 집 식모로 보냈는데 그 딸이 가장노릇을 혹독하게 한 셈이었다. 또 월남전으로 간 둘째동생이 보내오는 돈도 있어 크나큰 보탬이 되기도 했다.

농민들 숫자가 절대다수였던 시절, 내가 사는 마을에는 명절을 아주 길게 즐겼다. 섣달그믐날부터 시작된 명절놀이는 나무 아홉 짐 하고 밥 아홉 그릇 먹는다는 대보름을 지나 ‘2월’이라고 하는 음력 2월 중순이 되도록 남자들은 주야장창 밀주(密酒)를 퍼마시며 놀았다. 산에 가서 나무를 해오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일이 없는 시기였다. 깊은 산까지 갈 엄두를 못내는 이치로 씨 나뭇짐은 체수가 짧은 나무들을 엉성하게 묶은 두 단만 달랑 지게 위에 올려놓은 게 흡사 까치집처럼 보였다. 노동이 몸에 맞지 않아 일이 어설펐던 그는 막걸리도 두어 잔이면 금방 취해버렸다. 술이 취하면 “내가 살면 얼마나 산다고 노세, 노세”를 외치며 자리에서 일어나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영천읍내 물레방아 나를 안고 돈다’만 수도 없이 반복하는 사람이었다. 술만 마시면 고질병인 치질이 도져 핏물이 한복 엉덩이 짬을 적시곤 해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치로 씨가 그렇게 일머리를 모르는 어설픈 농사꾼으로 전락해버린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열서너 살 무렵이었다고 한다. 집에 자주 드나들던 점쟁이가 무심코 내뱉은 말 한마디를 몰래 엿들은 어느 날부터였다. 무슨 일을 시키면 “내가 살면 얼마나 산다고…” 그렇게 중얼거리며 아예 일을 하지 않았다. 점쟁이가 이치로 씨 어머니에게 한 말은 이랬다.

“아이고야, 이 집 큰아들 마흔도 못 넘길 팔잔데 양밥이나 하소.”

막걸리 두어 잔 끝에 춤추며 노래하던 이치로 씨 생애는 환갑날 점심 무렵까지였다. 여자 점쟁이 예고를 참담하게 무너뜨렸는지, 액땜하는 그 어떤 ‘양밥’을 했는지는 몰라도 집안사람들 두루 불러 환갑 아침을 먹은 뒤, 7월 뙤약볕 속으로 가래 메고 물고 보러 나갔다가 넘어져 일어나지 못했다. 맹렬한 무더위 속에서 달구를 하면서 동네 사람들은 점쟁이 말 한마디에 생의 의욕을 꺾어버린 사내, 그 가객의 죽음을 아주 서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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