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국회 속기사④ 6.25 전쟁, 전황을 속기하다

  • 입력 2018.07.08 10:28
  • 수정 2018.07.12 14:38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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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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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헌국회 시절에는 우리나라에 워낙 속기사의 수가 적었기 때문에, 국회 소속이면서도 행정부에 불려가서 속기 업무를 수행하기도 했다. 당시 국회 속기사였던 김진기 씨 역시, 공보처에 파견 나가는 일이 잦았다. 이승만 대통령이 기자회견을 할 때마다 그 내용을 속기로 받아서 기록하는 역할을 맡았던 것이다.

1949년의 어느 일요일 새벽, 전화벨 소리가 김진기를 깨웠다. 송수화기 너머의 인물은 공보처장이었다.

“당장 진해에 내려가야 하니까 빨리 복장 갖추고 공보처로, 아니 비행장으로 나와요!”

경남 진해에서 이승만 대통령과 장개석 자유중국 총통이 정상회담을 하는데, 급히 속기사를 내려 보내라는 연락이 왔다는 것이다.

“그땐 민항기도 없던 시절이라 일반인이 비행기를 타본다는 것은 꿈같은 얘기였지요. 여의도 비행장에 나가니까 비행기 두 대가 대기하고 있더라고요. 조종사를 제외하곤 달랑 한 사람밖에 탈 수 없는 경비행기였어요. 나 말고 또 한 사람의 속기사도 동행을 했지요.”

그야말로 날틀 수준의 그 경비행기를 타고 진해로 날아가서는, 이승만과 장개석의 역사적인 회담을 속기하는 임무를 수행했다면서, 김진기 씨는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1950년 6월, 전쟁이 터졌다. 군에서는 인민군을 의정부의 전선에서 이미 격퇴했으니 안심하라고 발표했다. 그러고는 대통령을 비롯하여 국회의원들도 서둘러 모두 남쪽으로 피란했다. 속기사들도 우선 연락되는 사람들끼리만 피란길에 올랐는데, 김진기 등 일부는 미처 떠나지 못 하고 서울에 남아 숨어 지내야 했다.

얼마 뒤 9.28 수복으로 부산에 내려갔던 국회가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그런데 국회 속기실에 감도는 공기가 심상치 않았다. 속기사는 비밀을 취급하는 요원이기 때문에, 서울에 남아 있었던 속기사들의 성분을 개별로 심사를 하겠다고 통보한 것이다.

“세상에, 안심하랄 때는 언제고, 피란 못 가고 서울에 숨어 지낸 속기사들에게 ‘적 치하에서 부역행위를 하지 않았느냐’, 해서 심사를 하겠다니 이게 말이 돼요?”

다행히 그 일로 해를 입은 속기사는 없었다.

전황은 다시 바뀌었다. 중공군이 밀고 내려온 것이다. 이번엔 김진기도 ‘1.4 후퇴’의 대열에 합류했다. 그런데 제헌국회 개원 이후 그 때까지의 의정활동상을 기록한 국회 속기록이 아주 없어질 뻔한 일이 있었다. 사무처에서는 국회의 각종 서류들을 서울에서 수원으로, 거기서 다시 천안으로 이송했다가 부산으로 실어가도록 방침을 세웠다. 그런데 서류 후송을 담당한 국회 직원이, 천안에서 출발하는 서류 수송트럭에다 자신의 개인 화물을 싣고 가버리는 바람에, 입법부의 주요 서류를 운송할 방법이 없어져버린 것이었다.

현장에 있던 국회 직원 한 사람이 다른 서류들은 모두 포기하고 속기록만을 챙겨 꾸려서는 천신만고 끝에 부산에 도착함으로써, 조선시대로 치면 사초(史草)가 망실될 위기를 면한 것이다.

다행히 제헌국회 때에는 본회의의 내용만을 속기록에 담았기 때문에 분량이 그리 많지 않았다. 나중에 천안에서 속기록을 꾸려 지고 부산에 갔던 직원은 표창을 받았고, 서류 운송 책임자는 면직처분을 당했다는 것이 김진기 씨의 증언이다.

전쟁이 일어나서 할 일이 없어져버렸으니, 속기사들은 생계를 위해서 요즘 식으로 말하면 ‘알바’라도 뛰어야 했다. 전쟁 통에 국회속기사들 대부분은 통신사의 부업을 했다. 라디오를 켜면 일본의 극동군사령부에서 한국의 전쟁 상황을 시시각각 방송했다. 속기사들 대부분이 일본어 속기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 적어서 통신사에 제공했다. 나중에는 속기사들이 아예 통신사를 차렸다. 그것을 ‘라디오 프레스(Radio Press)’, 즉 RP 통신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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