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시대를 열어가는 통일운동가
통일시대를 열어가는 통일운동가
  • 심증식 기자
  • 승인 2018.07.01 18: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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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특집 인터뷰 l 이창복 6.15공동선언실천남측위원회 상임대표의장
이명박정권 들어 경색된 남북관계 … 6.15공동선언실천남측위, 문재인정부서 다시 전열 가다듬어
지난달 20일~23일 평양서 6.15공동위 남·북·해외 위원장단 회의 열려 … 남측 15명 공동위원장 참가
4.27 남북정상회담의 판문점선언 이행, 민족공동행사 개최 및 노동자·농민 계층별 접촉 확대 등 합의

[한국농정신문 심증식 편집국장]

강원도 원주 출신의 이창복(80) 6.15공동선언실천남측위원회 상임대표의장은 1958년 고려대학교에 들어갔다. 대학에 다니면서 이창복 의장은 당시에 씨알소리의 함석헌 선생과 서울대학교 유달영 박사의 강의를 들으러 다녔다. 이분들의 강연 내용은 농촌을 살려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당시 어려운 농촌을 살리는 것은 사회의 가장 큰 과제였고, 사회적 책임의식을 가진 지식인들의 중요한 관심사였다.

대학시절 이상적인 농촌 건설의 꿈을 실천했던 이창복 6.15남측위원회 상임의장은 문재인정부에서 급진전 되고 있는 남북평화통일의 길을 또 앞장서 실천하고 있다. 지난달 20일부터 23일까지 평양에서 열린 6.15위원회 위원장단 회의엔 남측에서 15명의 공동위원장이 참석해 남북교류 확대에 성큼 다가섰다. 원재정 기자
대학시절 이상적인 농촌 건설의 꿈을 실천했던 이창복 6.15남측위원회 상임의장은 문재인정부에서 급진전 되고 있는 남북평화통일의 길을 또 앞장서 실천하고 있다. 지난달 20일부터 23일까지 평양에서 열린 6.15위원회 위원장단 회의엔 남측에서 15명의 공동위원장이 참석해 남북교류 확대에 성큼 다가섰다. 원재정 기자

이상적인 농촌 건설의 꿈, 학업으로 이어

“함석헌 선생과 유달영 박사의 강연을 들으며 농촌에 기여해야 한다는 마음을 먹게 되었고 당시 젊은 청년 네 명의 동지들과 뜻을 합쳐, 대관령 안반데기에서 이상적인 농촌을 만들기 위한 약속을 굳게 했어요.” 대학생 이창복은 ‘안반데기 결의’를 실천하기 위해선 더 많은 공부를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학업을 계속했다. 1년 반 공부를 하고 돌아왔는데 그 때 마침 박정희가 5.16 군사정변을 일으켜 이창복의 이상적 농촌건설의 꿈은 좌절됐다.

“이상적인 농촌 건설을 위해서는 정부의 협력이 필요한데 박정희정부의 도움을 받을 수 없어서 농촌에 대한 꿈을 접고 상주대학교 전신인 원주대학에서 사회학을 3년 동안 가르쳤어요.” 이후 가톨릭노동청년회 활동을 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사회운동을 시작했다. 이렇게 시작된 사회운동은 민통련 사무처장, 전민련 의장, 전국연합의장 등 80~90년대 민주화 운동을 이끄는 대중운동의 지도자로 활동범위를 넓혔다. 마지막 재야인사라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많은 민주화운동 지도자들이 정치에 진출했지만 이창복 의장은 재야에서 민주화운동을 이끌었다.

3선 의원 물리치며 정계입문

재야 민주화 운동의 한길을 걷던 그였지만 2000년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총재의 강권에 정치에 입문하게 된다. “오래 전부터 정치를 하라는 제안은 여러 차례 받았지만 그 때마다 번번이 거절했어요. 그러다 김대중 총재가 정치인으로 마지막 부탁이라고 청하는 거예요. 새정치국민회의를 해체하고 개혁적인 당을 만들겠다며 함께 하자고 하는데 정면에서 거절하기 어려워서 ‘알았다’ 하고 나왔는데 그 후 상의도 없이 원주 조직책으로 임명했어요.”

이창복 의장의 정치권 진출은 본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김대중 총재에 의해 이뤄졌다. 이 의장은 당시 3선 한나라당 의원인 함종한 국회 교육위원장을 물리치고 16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국회의원을 하면서 국가보안법 철폐를 위해 노력을 많이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면서 초선의원으로 국회의원 활동을 마감했다. 이후 원주에서 지역 특산물인 원주 한지개발원을 설립했고 무보수로 지역의 전통문화를 보급하고 발전하는 활동을 지금까지 이어 오고 있다.

6.15 공동선언, 전파·계승 전념

이창복 의장은 5년 전부터 6.15공동선언실천남측위원회를 맡아 활동하기 시작했다. 6.15공동선언실천위원회는 노무현정권 때인 2003년 남·북 그리고 해외, 3개 지역에 조직이 건설돼 6.15공동선언 정신을 이어 받아 전파하고 계승하기 위한 민간 통일운동을 대표하는 활동을 해왔다. 남·북·해외가 모여 회의를 하고 민족공동행사를 개최하기도 했지만, 2007년 금강산에서 개최한 민족공동행사를 끝으로 봉쇄돼 9년간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순수 민간운동조직이지만 정부와 밀접한 연관이 있어요. 남북관계는 정부가 불허하면 못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2007년 금강산 행사에서 조직 확대와 공동선언실천을 다짐했지만, 공동행사는 그 때가 마지막이었다. 이명박정권이 들어서면서 남북관계는 급속히 경색됐을 뿐 아니라 남북간의 교류는 완전히 중단됐다.

그럼에도 6.15위원회는 매년 중국의 북경 또는 심양에서 위원장단 회의를 개최했으며, 민족공동행사 성사를 다짐하면서도 공동개최가 불가한 상황이기에 남·북·해외 각각 분산개최 하며 공동결의문을 발표하는 방식으로 활동의 맥을 이어갔다.

문재인정부 출범, 평창올림픽을 평화올림픽으로 ‘결의’

6.15위원회는 문재인정부가 출범하면서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활동을 시작했다. 본격적인 활동은 지난 평창동계올림픽에서의 공동응원이다. “4.27 남북정상회담이 그냥 이뤄진 것이 아니예요. 작년 3월에 심양에서 6.15 위원장단 3자 회의에서 평창올림픽을 평화올림픽으로 성사시키기로 결의했어요. 그리고 작년에 테스트 이벤트 행사를 하고 올해 2월 동계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하게 된 거죠.” 그러나 평창동계올림픽 현장에서 평화올림픽 성사를 위한 민간의 노력은 기존 관료조직의 방해로 쉽지 않았다.

“평창동계올림픽에서 남북 공동응원단을 조직해서 응원하려는데 국정원, 통일부 직원들이 나와서 현수막이나 북 등 이런 응원도구도 못가지고 가게 했어요. 그래서 최문순 강원도지사가 북을 들고 들어갔는데 응원단이 북을 못 치게 했어요. 북측응원단이 250명 왔는데 접근할 수도 없게 했지만, 처음에는 남과 북이 따로따로 응원하다가 나중에는 자연스럽게 하나가 되어 응원을 하게 되더라고요. 구호도 같이 외치고 남측응원단이 ‘우리는’ 하면 북측응원단이 ‘하나다’라고 화답을 하고, 우리 응원단이 파도타기를 하면 처음에는 참여하지 않던 북측응원단도 나중엔 다 같이 어우러졌어요. 이것을 보면서 바로 이게 통일이구나, 만나면 하나가 된다, 이런 걸 느꼈어요.”

평창올림픽 전까지만 해도 한반도는 일촉즉발의 위기와 긴장이 팽팽했다. 평창올림픽이 평화올림픽으로 전환되면서 한반도에 드리운 긴장이 해소되기 시작했다. “작년에 테스트 이벤트 때 관중들에게 단일기를 나눠주면 잘 받아가지도 않았어요. 그런데 평창올림픽에서는 단일기를 서로 받아가고 응원이 끝나면 하나도 버리지 않고 기념품으로 가져갔어요. 이렇게 인식의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한 거죠. 통일운동이 다른 것이 아니고 바로 이런 것이 통일운동인거죠.”

평창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는 이후 남북관계가 급진전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후 4.27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되고 이어서 북미정상회담으로 이어지면서 한반도 정세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이 과정에서 6.15위원회의 공동응원단 활동이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이제 지난 9년간 단절되었던 민간 교류의 길이 본격적으로 열릴 차례다.

순탄치 않았던 평양 가는 길

지난달 20일부터 23일까지 평양에서 6.15위원회 위원장단 회의가 개최됐다. 그러나 출발은 순탄치 않았다. “20명 방북신청을 했는데 5명이 불허 되었어요. 뚜렷한 이유도 없이, 그래서 회의를 연기하자고 했는데 이미 두 번 연기 끝에 성사된 회의라 더 연기할 수가 없어서 15명만 가기로 하고 통일부에는 강력 항의했어요.” 통일부에서는 출발 이틀 전에 방북 불허에 대한 기준과 원칙을 제시하지 않은 채 구두로 5명에 대한 불허통보를 전달했다. 원래는 이창복 의장도 불허 대상이었는데 대표의 방북까지 막으면 일이 커질 것을 우려해서 방북불허 명단에서 빠졌다는 후문이다.

12년 만에 방문한 평양, 창조적 아파트와 늘어난 택시

그는 12년 만에 평양을 방문하게 됐다. “평양이 많이 변했어요. 발전했다는 거죠. 건물도 디자인적으로 잘 지었고 색깔도 베란다도 예쁘게 만들어 놨어요. 천편일률적인 건물이 아니라 각각의 모습이 창조적으로 아파트를 짓고. 특히 평양시내에 택시가 많았어요. 전에는 없었는데. 시민들 복장도 많이 밝아지고.” 10년이 넘는 시간동안 평양은 참 많이 달라졌다고 했다. 지난 북미정상회담 때 북에서 공개한 김정은 위원장의 출국장면 영상을 보면 깨끗하고 번듯한 평양공항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평양공항은 최근에 청사를 다시 짓고 터미널도 1개에서 2개로 늘렸다고 한다.

평양에서 3박4일간의 일정은 빡빡하게 진행됐다. 20일 저녁에 평양에 들어간 대표단은 북측위원회에서 마련한 환영만찬으로 일정을 시작했다. “3박4일이라지만 회의를 할 수 있는 시간은 21일, 22일 이틀 뿐 이었어요. 21일 오전에는 의장단 기조연설하고 오후에 부문별 회의하고 22일 오전에는 전체회의하고 오후에 부문별 회의하고. 틈틈이 시내참관을 했어요. 그리고 22일 저녁에 남측이 주최하는 환송만찬을 끝으로 행사를 마쳤어요.”

이번 회의는 4.27 남북정상회담 이후 민간에서는 최초로 개최된 회의이며, 2007년 이후 중단된 남북 민간교류가 11년 만에 재개되는 역사적 의미를 갖는 회의이다. 그래서 이번 회의에서는 4.27 선언의 실천과 민간교류 활성화가 주로 논의됐다.

“남측에서는 세 가지 의제를 준비했어요. 첫째는 4.27 판문점선언을 이행하기 위한 우리의 역할, 둘째는 올해 8.15, 10.4 내년 3.1 100주년 행사를 민족 공동행사로 치르는 문제, 셋째는 분야 계층별 접촉을 통해 남북교류를 확대하는 것 등이었죠.” 준비된 의제는 모두 논의 됐고 대부분 합의돼 합의문에 포함됐다. 그러나 8.15 행사에 관해서는 완전한 합의를 보지 못하고 추후에 다시 논의하기로 했다. “이번 회의에서 매년 연초에 정례적으로 위원장 회의를 하기로 합의했고, 공동위원회 정관을 개정해서 6.15뿐만 아니라 10.4 선언과 4.27 선언을 실천하는 운동체로 발전시키기로 했어요. 그리고 부문별로는 우선 노동자 축구대회가 합의됐고, 각 부문별 제안된 내용을 토대로 실무회담을 개최하기로 했습니다.”

10.4 선언과 3.1절 100주년 남북공동행사 합의

우리가 관심을 갖는 민족공동행사로 일단 10.4 선언 기념행사와 내년 3.1절 100주년 기념행사가 합의됐다. 그리고 부문별로는 향후 실무회담을 통해 사업을 진행하기로 했다.

농민부문을 대표해서 참석한 전국농민회총연맹 박행덕 의장은 ‘통일쌀 보내기, 종자나누기, 농기계 보내기, 남북농민추수한마당’ 등을 조선농업근로자동맹(농근맹)에 제안했다. 농근맹에서는 제안 내용 검토 후 실무회담을 통해서 구체적인 협의를 하기로 했다. 북측에서 그동안 꾸준히 통일운동을 펼쳐온 전농에 대해 깊은 관심과 신뢰를 보냈다고 한다.

특히 지난 평창올림픽에서 농민 1,000여명이 통일밥상을 나누고자 평창으로 달려가 정동진에서 북측응원단과 함께 어우러져 통일의 염원을 나눈 것에 대해 깊은 사의를 전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창복 의장 역시 전농이 지속적으로 통일운동에 앞장서온 것에 대해 깊은 감사의 뜻을 밝혔다. “전농을 비롯한 농민 통일일꾼들이 통일쌀 경작과 통일쌀 모으기 행사를 꾸준히 해온 것에 경의를 드립니다. 농민은 우리사회의 기본조직입니다. 그것은 식량을 생산하고 생명을 창출하는 역할을 농민이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분들이 통일 문제에 크게 기여해 왔고 앞으로도 많이 더 넓고 깊게 통일운동에 앞장서 달라는 부탁을 하고 싶습니다.”

남과 북, 닫혔던 문이 다시 열리는 길에 앞장섰던 이창복 의장은 사회 각 분야 통일운동의 고리를 단단히 엮는 일에 언제나처럼 매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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