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국회 속기사③ 속기사도 두 손 든 ‘속사포’ 의원

  • 입력 2018.07.01 17:20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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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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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 경기 중에서 농구경기를 중계하는 아나운서의 말이 가장 빠르다고 한다. 그런데 국회 속기사들은 3, 4, 5대 의원을 지냈던 김선태 의원의 발언 속도가 그보다 훨씬 더 빨랐다고 증언하였다.

당시 여당(자유당) 의원들은 흥분할 일이 적어서 발언이 차분했던 데 반해서, 그는 자유당의 독재와 부패를 질타하는 데 선봉으로 활약했던 야당의원이었으므로, 속기사들이 말을 받아 적기에 더욱 애로가 컸다는 얘기다.

1961년 4월 21일 국회 본회의장, 왕년의 판사 출신 김선태 의원이 속사포를 쏘아댄다.

“만일 정당에서 공안위원회 구성을 다 해버린다고 하면, 매일같이 지금 국회에서 투쟁하고 있는 거와 마찬가지로(…)우리가 과거에 여러 가지 사건을 다루는 데 있어 여야가 대립해서, 보고서 하나 작성할 수 없었던 현상을 바라볼 적에(…)공안위원들이 만일 정당대표 방식으로 구성해버리면 여야의 투쟁으로 말미암아, 경찰조직은 마비될 우려가 있고(…)이것을 근심하는 것이 그 하나의 이유이고, 또 한 가지 이유는 무엇인고 하니…잘 들어요, 장관!”

흡사 요즘의 검경 수사권 다툼 주제 내용과 엇비슷한 얘기들을 속사포로 순식간에 쏟아내자 발언 내용을 제대로 받아 적지 못한 속기사들은 진땀을 흘렸다. 회의가 끝나자 사무실로 돌아온 속기사들이 걱정을 토로한다.

“아이고, 못 받아 적은 게 많은데 이거 큰일 났네. 어이, 김진기 씨, 속기해 놓은 거 이리 가져와봐. 김선태 의원이 한 발언에서 중간부분, 그 공안위원회 문제점 거론한 곳 말이야….”

“아이고 저도 그 부분은 정확하게 못 적었는데요.”

“할 수 없지 뭐. 내일 아침에 김 의원 사무실로 찾아가서 보여주고 빠진 부분은 좀 얘기해달라고 하는 수밖에.”

다행히 김 의원은 자신의 말이, 속기사들이 받아 적기에 지나치게 빠르다는 걸 스스로도 인정하고, 혹 빠뜨린 부분이 있더라도 속기사들을 탓하지는 않았다고 김진기 씨는 회고한다.

“빨라도 보통 빠른 게 아니었어요. 보통 우리가 10분에 3,000자를 속기하는데요, 김선태 의원의 발음을 녹음해서 재보니까 5,000자를 발음했더라고요. 그래서 속기사들 사이에서 기피 인물이 됐지요.”

속기사들이, 속기를 일반 문자로 옮기는 과정에 의원 사무실로 찾아가서 전날 했던 발언을 보충 설명해 달라고 부탁하는 경우는 또 있었다. 사투리가 심한 의원들의 경우였다.

“당시엔 그야말로 그 지방 출신이 아니면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사투리가 의사당에 난무했지요. 속기 체계가 표준어를 중심으로 만들어져 있었기 때문에 특히 매우 심한 전라도 사투리나 경상도 사투리는 도무지 뭔 소린지 알아들을 수 없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그러나 그런 경우를 제외하고는, 속기사들은 자신이 적은 기록을 함부로 고칠 수 없을뿐더러, 고쳐 달라는 압력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런 일이 있었다. 1950년대 초 부산 피란시절의 국회사무처 속기과에 높은 사람이 들이닥쳤다.

“아니, 장관님께서 저희 사무실에 어떻게….”

속기과 사무실을 불시에 찾아온 사람은 조병옥 당시 내무부 장관이었다.

“어제 장택상 국회 부의장이 했던 발언 기록 좀 볼 수 있나? 누가 기록했나? 이리 좀 가져와 보게. 장택상 이 사람이 감히 나를 모욕하는 발언을 했어!”

장택상의 발언을 기록한 속기사는 장덕근이었다. 속기록을 확인한 조병옥은 더욱 흥분해서 국회 부의장이던 장택상에게 거세게 항의를 했고, 장택상은 자신이 전날 했던 발언을 취소하겠다면서 속기과 직원인 장덕근을 부의장실로 불렀다. 해당부분을 지우라는 것이었다. 장덕근은 지울 수 없다고 버텼다. 그러자 장택상의 비서였던 김영삼이 나섰다.

“당신 안 되겠네. 뒷조사 좀 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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