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뚜기처럼 일어선 팔순 농부의 인생역정

이 사람ㅣ전북 익산의 임차농 한한수씨

  • 입력 2018.06.24 13:21
  • 기자명 심증식 기자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국농정신문 심증식 편집국장]

전북 익산의 들판이 푸르게 변하고 있다. 이제 모내기가 끝났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이곳에서는 밀 수확과 모내기가 동시에 이뤄지고 있다. 한쪽에서는 콤바인이 밀을 베고 있고 밀 수확이 끝난 논 여기저기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밀짚을 태우는 것이다. 밀짚을 태운 논에서는 물을 대고 트랙터가 부지런히 로터리 작업을 한다.

옛말에 5월 농부, 8월 신선이라고 일 년 중 가장 바쁜 철이 모내기철이라지만 이렇게 2모작 농사를 하는 곳은 수확과 모내기를 동시에 해야 하기에 더욱 분주하다.

5월 중순부터 시작된 전북 익산의 모내기는 6월 말이나 돼야 끝이 난다고 한다. 조벼(조생종 벼)를 심기 시작해 만생종을 심고 이어서 이모작 논에 모내기를 한다. 지금은 밀을 베고 마지막 모내기가 한창이다.

전북 익산시 함라면 신승리에 사는 한한수(84)씨는 오늘도 남아있는 논에 모내기를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집 마당에는 한씨의 발 역할을 하는 오토바이에 삽 한 자루가 꽂혀 있다. 마당 옆 창고에서는 건조기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하다. 며칠 전에 수확한 보리를 말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윗 마당 아랫 마당 하우스에는 잘 자란 모판이 3,000개나 남아있다. 아직 30여 필지를 더 심어야 모내기가 비로소 끝난다고 한다. “밀 벤 논이 아직 남아서 다음 주까지는 해야 끝나. 하루에 7필지를 심는데 오늘 아침에 4필지 심고 들어왔지.” 그는 오전 모내기를 마치고 점심참에 잠깐 시간을 내서 기자를 맞았다.

한씨는 13살부터 지금까지 70여년을 농사에만 전념하고 살아온 사람이다. 84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농사를 손에서 놓지 못하고 있다. 이제는 아들과 손자가 농사를 거들고 있지만 여전히 8만여 평 농사에 큰 버팀목 역할을 하고 있다.

“선제(임차)농사를 짓는 거라 논이 여기저기 있어. 아주 먼 곳에도 있고. 새벽 5시에 오토바이 타고 나가서 논을 둘러보는데 꼼꼼히 볼 수는 없어. 물 있는 논은 멀리서 보고 지나가고 물 없는 논만 물꼬를 보고 다녀도 8시가 돼야 끝나.”

기계로 하는 일은 아들과 손자가 하지만 농사의 자잘한 뒷일은 모두 한씨가 돌봐주고 있다.

한한수씨와 그의 아내 김정식씨가 두 손을 꼭 잡고 카메라 앞에 섰다. 삶의 동반자로서 함께였기에 온갖 고난과 역경을 딛고 일어선 부부의 인상이 푸근하다.
한한수씨와 그의 아내 김정식씨가 두 손을 꼭 잡고 카메라 앞에 섰다. 삶의 동반자로서 함께였기에 온갖 고난과 역경을 딛고 일어선 부부의 인상이 푸근하다.

뿔뿔이 흩어진 가족 그리고 머슴살이

그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학교도 제대로 다닐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집안을 돌보지 않았다. “국민학교에 다니다가 12살에 중퇴했어. 집안이 말도 못하게 어려워졌지. 그리고는 가족들이 다 뿔뿔이 흩어져 살았어.”

한씨는 그 시절 부모와 함께 지내지 못하고 할머니와 같이 살았다. 그러던 중 아버지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13살 때 9월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12월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셨다는 소식도 나중에 알게 됐어. 우리가 4남매였는데 모두 뿔뿔이 흩어져 살았고 나는 할머니와 같이 살아서 아버지 어머니 돌아가신 상황도 잘 몰라.”

그는 여기까지만 말한 뒤 내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옆에 있던 그의 아내의 말에 의하면 시아버지는 아편도 하고 두 집 살림을 했다고 한다. 소설에서나 나올법한 한량 같은 인물이었으리라 짐작해 본다. 집안을 돌보기커녕 가을 추수가 끝나면 들어와 나락을 몽땅 걷어 가지고 나갔다 한다. 그러니 남은 식구들이 살아갈 길이 얼마나 막막했을까.

급기야 식구들은 각자 연명해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서로 울타리가 돼 주지 못하는 가족들은 여러 집으로 흩어졌고, 세 끼 밥만이라도 해결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에도 얹혀살게 됐다. 어린 자식들을 거두지 못한 부모, 붕괴된 가족은 서로를 살뜰히 챙길 여건도 되지 않았다. 부모의 부고조차 뒤늦게 알게 된 아픈 배경이다.

부모님이 돌아가실 쯤에 13살 소년 한한수는 머슴살이를 시작하게 된다. 어려운 형편에 입 하나라도 줄여야 하니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13살 어린 나이에 한씨는 자신의 삶을 감당해야 했다.

“어리다고 품삯이 아예 없었어. 삼시세끼 얻어먹는 게 품삯이지. 그렇게 3년을 공짜 머슴으로 지내다가 15살 되니까 1년에 쌀 1가마씩 받았어. 16살 되니까 2가마씩 받고.”

한씨는 품삯을 받기 시작하면서 쌀을 불리기 시작했다. “그때는 쌀 한가마를 빌려주면 곱장으로 받았어. 쌀 한가마를 빌려주면 이자로 한가마를 받아 1년 후면 두가마가 되는 거지. 몇 년 동안 모아서 논 800평을 마련했어.”

머슴 생활을 하면서 품삯으로 받은 쌀을 착실히 불려서 논을 장만한 것이다. 그런데 고생고생해서 마련한 땅은 허무하게 사라졌다. “동생이 결혼해서 살림을 나게 됐어. 논 800평을 팔아서 쌀 30가마를 해줬지. 그런데 그걸 그날 저녁에 노름판에서 다 날려 버린 거야. 그러더니 서울로 가버렸어.” 머슴살이로 모은 쌀로 장만한 땅이 동생의 살림밑천이 되길 바랐으나 하룻저녁에 허망하게 날아가 버렸다.

억척스럽던 삶 그리고 대장암

그의 머슴생활은 23살 때 결혼을 하면서 마치게 됐다. 한씨의 아내는 완주 봉덕면이 고향인데, 익산 함라면에 고모가 살고 있어서 아내의 고종사촌 언니의 중매로 한씨를 만나 결혼하게 됐다. 결혼을 하면서 부부는 더욱 열심히 일을 했다. 한씨의 아내는 가난한 살림살이에 보탬이 되고자 온갖 거친 일을 가리지 않았다. 지게질, 똥지게, 할 것 못할 것 다하면 지냈다고 한다. 모내기철에는 빨랫감을 머리에 이고 논에 나가서 점심 먹고 쉴 참에 빨래를 해가면서 농사일을 했다고 한다.

“아이쿠 말도 마. 참 억척스럽게 일했어. 여름에는 농사짓고 가을 되면 경운기에 탈곡기를 싣고 다니면서 타작을 하러 다녔어. 아들이 커서는 셋이 다니면서 일을 했지.” 가진 것 배운 것 없는 한씨가 사는 길은 묵묵히 열심히 일을 하는 것 밖에 없었다. 가을 내내 타작을 하러 다니면 한해 쌀 30가마 정도는 벌었다. “그때는 ‘쌀 계’라는 것이 있었어. 10명이 10가마씩 내는 계를 하면 탈 때 100가마를 타는 거야. 그럼 그걸로 땅을 사는 거지. 그렇게 해서 땅을 조금씩 장만 했어.”

그 뿐 아니었다. 예전에 이곳은 고구마를 많이 심었다고 한다. 고구마 수확시기가 되면 소달구지로 운반하는 일도 했다. “황등지역이 고구마로 아주 유명하거든. 고구마를 캐면 읍내로 수매하러 가져가는데 소달구지로 실어 날라 주는 거야. 길도 좁고 울퉁불퉁한 길로 10리길을 다닌 거야.”

당시 농촌에서 돈이 되는 일이면 뭐든지 했다. 그래도 한씨는 그 시절이 좋았다고 회상한다. “그때가 좋았어. 빚도 없고 쌀 계 타가지고 논 한 필지씩 사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어.”

이렇게 고생해가며 한 필지씩 사 모은 땅은 어느덧 12필지가 됐다. 남의 집 머슴으로 출발해서 1만5,000평에 달하는 땅을 갖게 된 것이다.

좋은 일만 이어진 것은 아니다. 한씨가 고비를 맞게 됐다. 대장암에 걸린 것이다. “특별히 아프거나 하지 않았어. 몸이 으슬으슬 추운 것 갖고 가끔 대변에 피가 나오더라고. 그래서 원광대병원에 갔는데 대장암이라는 거야. 그때는 의료보험이 없던 때라 다른 사람 카드로 갔었는데, 남의 카드로 수술하는 게 마음에 걸려서 원광대병원에서 수술 안하고 서울로 갔지.”

한씨는 이때 송아지 한 마리 판 돈을 가지고 서울 세브란스 병원에 갔다. 그러나 수술비엔 턱없이 부족했다.

“마침 서울에 집안 조카가 그 병원 의사로 있어서 돈 걱정 말고 일단 수술하라고 해서 수술을 할 수 있었어. 병원비가 450만원이 나왔는데 집안 조카가 우선 내주더라고.” 조카의 도움으로 수술을 무사히 마치게 됐다. 수술비는 그 해 가을 논을 팔아서 갚았다. 나락 한 가마에 4,000원 하던 때이니 1,000가마 넘는 나락을 수술비로 쓴 것이다, 의료보험이 없던 시절 큰 병은 가산 탕진의 지름길이던 때였다. 그래도 한씨는 그간 장만한 땅이 있어서 감당할 수 있었다.

그때 나이가 50세였다. 다행이 수술이 잘 돼 대변 봉투를 가지고 다니며 생활하는 것 빼고는 지금까지 큰 어려움이 없이 지내고 있다.

일생을 성실하게 살아가면서 땅을 마련하고 어엿한 자작농으로 자리잡은 한씨는 큰 어려움 없이 지내게 됐다. 슬하 6남매 중 5남매에게는 땅을 한 필지 씩 나눠주기도 했다. 살아오면서 크고 작은 고비를 여러 번 겪기도 했지만 이겨내고 안정된 터전을 일궈왔다.

한한수씨가 모내기에 사용할 모판을 살펴보고 있다.
한한수씨가 모내기에 사용할 모판을 살펴보고 있다.

양돈장 화재로 빚더미 … “그래도 이겨낼 것”

그러나 2004년 일생일대의 위기를 맞게 된다. 둘째아들의 양돈농장에 화재가 난 것이다. “둘째가 양돈장을 짓고 돼지를 300마리 키웠어. 그런데 2004년 1월 4일에 불이 난거야. 전기 누전으로 불이 나서 양돈장을 몽땅 타 버렸지. 그동안 돼지값이 형편없다가 막 오르기 시작한 때였는데….”

양돈장 화재는 한씨가 지금까지 쌓아올린 것을 한순간에 무너뜨렸다. 양돈장을 지으며 얻은 빚은 모두 아버지 한씨가 보증을 섰기에, 화재 이후 재산을 다 팔아서 갚아야 했다. “양돈장 짓는데 내가 다 보증을 서 줬거든. 그러니 어떻게. 내가 다 갚아야지. 가지고 있는 땅 하고 애들한테 나눠준 땅 다시 돌려받아서 빚을 갚을 수밖에 없었어. 땅을 급히 팔려니까 헐값에 팔 수 밖에. 평당 4만원에 겨우 팔았는데 지금은 8만원이 넘어.”

2004년 양돈장 화재는 그와 가족 모두를 곤경에 처하게 만들었다. 당사자인 둘째아들 뿐 아니라 아버지와 같이 농사를 지어온 큰아들과 막내아들도 어려워진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제 내 땅은 한 평도 없이 남의 땅을 얻어서 농사를 짓고 있다. 8만여 평의 농사를 지으려니 트랙터, 이앙기, 콤바인 등 농기계 구입을 위한 부채만 수억원에 달한다. “평생 고생이란 고생 다해서 일궈놨는데 불이 나는 바람에 하루아침에 잿더미가 됐으니 허망하지.”

한씨와 아내 김정식씨는 평생을 성실하게 살아왔고, 팔순이 넘은 지금도 역시 한씨는 농사일을, 아내 김씨는 가족을 건사하며 살고 있다. 하지만 이들이 살아오는 과정마다 너무도 많은 질곡이 이어졌다. 어느 것 하나 원망하지 않고 모두 감당하며 지내 왔지만 노년에 닥친 화재사건은 일생의 고생을 허탈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한씨는 농사를 놓을 수 없다. 어떻게 해서든 지금의 어려움을 이겨내고 아들, 손자들이 농사기반을 만들 수 있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의 오른팔엔 깊게 패인 흉터가 있다. “5년 전 벼를 콤바인에 넣다가 다쳤어. 내가 키가 작으니까 바짝 붙어서 벼를 넣다가 팔이 기계에 딸려 들어갔어. 한참 고생했는데 지금은 괜찮아.”

저작권자 © 한국농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