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농경사회 사람들] 큰애야 셋째 온다, 빨리 숫돌 감춰라①

  • 입력 2018.06.17 13:24
  • 기자명 이중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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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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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한 점 없이 무더운 며칠 전이었다. 동생네 마늘 캐는 일 거들어주러 갔다가 선산 아래 저수지 한적한 곳에서 멱을 감았다. 어릴 적, 여름이면 날마다 발가벗은 몸으로 수영을 했던 곳이다. 더운 몸을 식히고 저수지 둑에 앉아 마을 쪽으로 내려다보니 첫눈에 들어오는 것이 드넓은 복숭아과수원이었다. 돌복숭아나무가 유난히 많았던 산 아래 과수원을 천천히 몇 바퀴 휘둘러 본 뒤 나는 돌아앉아 담배를 꺼내 물었다. 무심히 바라본 저수지 수면에 돋을무늬로 새겨지는 얼굴이 하나 있었다. 참 말이 없었던 사람. 금산어른 셋째아들이면서 홍웅흠 씨 둘째동생이었던 홍도흠. 오늘 아침 물어보면 내일 낮쯤에도 대답을 들을 수 없을 것 같은 답답한 사내. 능금나무 한 그루면 논 한 마지기와도 안 바꿔준다던 그 시절, 여남은 살 어린 나이로 마을에 하나밖에 없는 능금밭 주인집 머슴살이를 했던 사람.

그 홍도흠 씨가 머슴살이를 끝내고 결혼해서 정착한 곳은 부모님과 큰형이 거처하던 곳에서 두 집 건너 마을 맨 동쪽 산자락 아래 두 칸, 낡은 초가였다. 세간들과 함께 실려 온 몇 개의 벌통(양봉)은 내가 생전에 처음으로 본 것이었다. 몇 통의 벌들이 부지런히 꿀을 물어다 날라주었던 탓은 아니겠지만 도흠 씨 살림은 그야말로 불처럼 일어났다.

그가 정착한 이후 맨 먼저 한 일은 남쪽 개울 건너 건넌골과 윗동네 초입의 유수골 입구 무논들을 사들인 것이었다. 머슴살이로 받은 새경을 돈으로 바꾸어 한 푼도 축내지 않고 모아둔 덕분에 도흠 씨는 제법 많은 무논들을 사들일 수 있었다. 그 중에서 건넌골 무논은 내 아버지가 송아지 한 마리 팔아 고모로부터 어렵게 사들였던 것인데 여섯 아들을 키우느라 친구 아들에게 넘기지 않을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국민학교 4학년 때였던가, 아버지와 고모가 무논 흥정을 하는데 오백 원 때문에 한 닷새 정도 실랑이를 벌이던 장면은 아직도 또렷한 돋을무늬 기억으로 남아 있다.

도흠 씨는 늘 조선낫 두 자루를 들고 다녔다. 아침과 점심 뒤에는 낫 두 자루 들고 큰집으로 가서 형님 숫돌로 날을 벼려 봄부터 가을까지 풀을 베고 겨울이면 산에 가 물거리를 해다 날랐다. 그렇게 열심히 낫질을 하는 사람이 마당가에 숫돌 하나 장만해두지 않았다고 마을사람들이 수군거리던 어느 날이었다. 저만큼 골목길을 걸어오는 셋째아들을 발견한 아버지 금산어른이 낮지만 재빠른 말로 큰아들 옆구리를 쿡 찔렀다.

“야야 큰아야, 셋째 저 늠이 또 낫 갈러 온다. 어서 수틀 감차라.”

그렇다고 어디 숫돌을 냉큼 감출 큰아들이겠는가. 아버지 등을 밀어 방안으로 들어가게 한 뒤 웅흠 씨는 특유의 화사한 목소리로 먼저 말을 건넨다.

“동생 왔나. 밥은 우옜노. 아침 전이면 들어가서 밥이나 묵고 낫 갈어라.”

그 말 뒤에 한번쯤 헛말으로라도 사양할 도흠 씨가 아니었다. 일 원도 재물이고 망개(청미래를 경상도에선 망개라고 부른다)도 과실로 여기는 사람이 아닌가. 방문을 열고 들어가는 셋째아들 뒤통수를 흘겨보던 금산어른이 숫돌을 들고 뒤란으로 갔다가 오자 곁눈질로 바라보며 미소를 머금던 큰아들이 그 숫돌을 찾아 제자리에 내려놓고 동생이 가져온 두 자루 낫날을 시퍼렇게 벼려주는 것이었다.

이렇듯 야무지게 사느라 동네사람들에게 싫지 않은 빈정거림을 듣기도 했으나 살림살이가 제법 반듯하게 펴지자 도흠 씨는 저수지 아래 밭으로 사용하는 하천부지 팔천여 평을 사들일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큰집 숫돌에 낫 벼리는 버릇은 여전했다.

도흠 씨가 사들인 팔천여 평 땅은 어릴 적 머슴살이를 했던 과수원과는 길 하나 건너에 있었다. 그 땅은 맨 먼저 농촌후계자로 선정되어 자금을 받아 수입 소 키우다가 쫄딱 망한 사람 것이었는데 빚을 갚느라 팔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도흠 씨는 그 땅에 능금나무를 심었다. 능금 값이 꽤 좋은 시절이었다. 그러나 능금농사 북방한계선이 자꾸 북쪽으로 밀려올라가면서 품질이 떨어지자 도흠 씨는 해마다 일정한 면적을 복숭아나무로 바꾸어나갔다. 복숭아농사 재미가 능금농사 재미를 앞지른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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