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국회 속기사① 말을 찍는 사진사

  • 입력 2018.06.17 11:43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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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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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 여러분, 모두 착석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랫동안 기다리게 해서 대단히 죄송합니다. 지금부터 의장 선출을 위한 절차에 들어가겠습니다. 우선 오늘 임시로 사회를 보실 분을 뽑겠습니다.”

“연령으로 보나 학식으로 보나 우리 민족이 가장 존경하는 김규식 박사를 임시 사회자로 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찬성이오!” “옳소!”(의석에서 박수 소리)

단기 4279년, 서기로는 1946년 12월 11일 오전 10시에 막을 올린 남조선 과도입법의원(南朝鮮過渡立法議院) 제1차 회의 장면이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이 과도입법의원은 미군정의 입법 자문기구로 출범을 했다. 물론 대한민국 최초의 입법기관은 1948년에 문을 연 제헌국회가 되겠지만, 과도입법의원의 이 날 회의가, 우리 역사에서 입법기관이 개최한 최초의 회의로 기록된 것이다. 이 날 회의에서 김규식 박사는 총 53표 중 49표를 얻어서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런데,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도 전에 열렸던 그 과도입법의원의 제1차 회의에서 어떤 의원이 어떤 발언을 했는지를 72년이나 지난 지금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회의에서 나왔던 발언을 한 마디도 놓치지 않고 기록해 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헐리고 없는 옛 조선총독부(중앙청) 자리에 들어 있던 과도입법의원의 부속 사무실-.

“아이고, 진땀 뺐네. 시골에서 올라온 의원들이 어떻게나 사투리가 심한지 알아들을 수가 있어야지.”

“미군정 치하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일본말이 아닌 우리말로 회의를 하는 장면을 보니까 해방이 되긴 됐구나, 실감이 나고 가슴이 뿌듯해지던 걸, 허허허.”

“그건 그렇고, 우리가 배운 것은 일본어 속기여서, 속기를 일단 일본말로 해놨으니 이걸 어떻게 조선말로 옮겨 쓰지?”

“일단 속기 내용을 일본 글자로 풀어 쓰는 번문(飜文) 작업을 한 다음에 다시 우리말로 옮겨 써야지. 이봐, 견습생! 내가 속기록을 보고 천천히 부를 테니까 일단 일본어로 받아 적어!”

“예, 선배님!”

여기서 견습생이라고 불리는 이 사람이 바로 우리에게, 제헌국회 이래 국회 속기사들의 활약상을 증언해 줄 김진기 씨(1928년생)다.

2003년 가을,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남양주의 한적한 마을로 그를 찾아갔을 때, 그는 76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국회 속기사로 활약해온 내력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김진기 씨는 과도입법의원에서의 견습생 시절을 거쳐, 1948년에 개원한 제헌국회 때 정식 속기사로 채용됨으로써 우리나라 의정 활동의 기록자로서 첫발을 내디뎠다는데, 그러나 평생 동안 국회 속기사로서 외길을 걸어온 그의 삶은 평탄한 것이 아니었다.

“제헌국회 때 국회에 들어갔는데 얼마 안 가서 6.25 전쟁이 터져버리네. 그래서 피란을 다니느라 3개월 동안 놀아야 했어요. 1960년대 초에는 5.16 쿠데타가 일어나서 국회가 해산돼버리는 바람에 또 3년 동안 할 일 없이 놀다가 1965년에야 복직을 했지요. 1980년도에는 또 신군부에 의해서 다른 동료들과 함께 쫓겨났어요. 9년 뒤인 1989년도에 복직해서 활동하다가… 결국 정년퇴임을 했지요.”

국회 속기사로서 김진기 씨가 살아온 곡절 많은 삶은, 해방 후 우리의 의회정치가 걸어온 내력을 비추는 거울이라 할 만하다. 굴곡 많았던 우리의 의정사를 가장 가까운 현장에서 지켜보고 기록했던 속기사들의 애환과 그 활약상을, ㄱ부터 ㅎ까지 차근차근 더듬어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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