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버스 차장⑤ 귀신 소동

  • 입력 2018.06.08 11:18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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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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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박봉자! 너 낼 막차 탄다고 했지? 이 언니가 좋은 걸 가르쳐 줄게. 자, 종이에다 표시를 하자면, 여기가 증평 종점이고, 이렇게 청주 쪽으로 죽 오다 보면 말이야…여기쯤에 저수지가 있고, 이쪽에 고갯길이 있잖아?”

“아, 초평 저수지 보이는 그 고갯길 말이지? 그런데 뭐가 어떻다고?”

“몇 년 전에 우리 회사 차장이 밤중에 막차 타고 거기를 지나오는데…분명히 차안에 손님이 한 명도 없었다거든. 그래서 자리에 앉아 동전을 꺼내놓고 세고 있는데…어떤 여자가 등 뒤에서 ‘거스름 돈 내놔!’ 그러더래. 딱 돌아보니까 소복 입은 처녀가 피 묻은 손을 내밀면서….”

“으악!”

맏언니 조춘희가 갑자기 귀신 얘기를 꺼내는 바람에 한밤중 기숙사에 난리가 났다. 그렇잖아도 <대한운수>의 안내양 기숙사에는 예부터 전해오는 귀신 얘기가 매우 풍성했다. 처녀들이 북적거리는 기숙사인 만큼 잘 생긴 총각귀신이 인기를 끌만도 한데, 전해오는 귀신들은 한 결 같이 소복을 입은 처녀귀신이었다. 그만큼 여성의 삶이 고단했다는 증표가 아닐지.

다음 날 박봉자는 예정대로 막차를 타고서 귀신 나온다는 저수지 인근의 그 고갯길을 넘어오게 되었다. 때마침 추적추적 비까지 내리고 있었으므로 머리끝이 쭈뼛, 곤두섰으나 물론 귀신은 나오지 않았다. 무사히 청주 차고에 도착하는가 싶었다. 그러나 시내 들머리의 들길을 달리던 중 진짜 귀신 소동이 일어나고야 말았다. 운전사는, 내릴 승객도 없었고 타려는 사람도 보이지 않았으므로 지나치려고 했는데, 박봉자가 출입문 벽을 두드리며 다급하게 소리쳤다.

“스톱! 정류장에 차 타려고 기다리는 사람 있는데 왜 그냥 지나가려고 그래요!”

“정류장에 누가 있다고 그래. 아무도 안 보이는데…?”

“저기 아저씨 한 분 서 있잖아요. 자, 아저씨 얼른 타세요!”

그러나 출입문을 열었던 박봉자는 화급하게 도로 닫고는 “귀신, 귀신!”을 중얼거리며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무슨 일인가 하여 밖으로 뛰쳐나갔던 기사가 돌아와서는 웃음을 터트렸다.

“바보야, 저건 논바닥에 서 있는 허수아비야, 하하하….”

차장 이력이 2년을 넘어 3년째로 접어들기까지 박봉자는 온갖 군상의 승객을 다 겪었다. 풍선껌을 내밀면서 돌아오는 일요일에 만나 데이트를 하자는 여드름투성이의 고등학생도 있었고, 어느 날 종점에서 동전을 헤아리고 있는 사이에 한 남자 승객이, 벗어둔 전대를 갖고 도망치는 바람에 그 달 월급을 한 푼도 못 받은 적도 있었다.

버스 차장 생활 3년을 채워가던 무렵, 박봉자는 심한 다리 통증에 시달렸다. 발가락은 동상으로 부풀어 올랐고, 손등도 터져서 금이 갈 지경이었다. 아버지뻘의 한 신사 승객과 말문을 튼 것도 그 즈음이었다. 함께 탄 학생들이 ‘선생님’이라 부르던 사람이었다.

“옥산중학교 수학선생님이었어요. 어느 날, 내가 다리가 불편해서 휘청거리는 모습을 유심히 보셨던가 봐요. 내리기 전에 전화번호를 적어 주시면서 일요일에 꼭 만나자고….”

멋대가리 없는 아들만 셋을 두었다는 그 선생님은 박봉자에게 아예 수양딸이 돼달라고 했다. 어느 일요일, 박봉자는 그 선생님으로부터 난생 처음 돈가스를 대접받았다. 식사를 마치자 그는 박봉자를 억지로다 시피 병원으로 데리고 가서는 엑스레이를 찍게 했다. 의사가 말했다.

“유마치스 관절염입니다. 증세가 아주 심해요. 어린 나이에 어디서 뭘 했기에….”

박봉자는 3년 만에 청주 <대한운수> 차장을 그만두었다. 1981년이었다. 다음해인 1982년, 서울지역에는 자율버스 제도가 도입되어 차장 없는 시내버스가 운행되기 시작했고, 1985년에는 전국의 모든 시내버스에서 ‘오라이, 스톱’을 외치던 버스 차장들이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박봉자(가명) 주부의 체험담을 마냥 편안하게 들을 수 없었던 것은, 그 나이 어린 소녀들에게 우리 사회가 지운 짐들이 너무나 과중한 것이었기 때문일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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