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칼럼] 마음을 얻는 농사

  • 입력 2018.06.03 08:40
  • 기자명 이영수(경북 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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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수(경북 영천)
이영수(경북 영천)

10여 년 전 내가 귀농할 때 만 하더라도 농사는 할 게 없어서 하는 직업이라는 인식이 많았고 동네 어르신들도 고향으로 ‘귀향(歸鄕)’한 나를 보고 ‘낙향(落鄕)’했다는 표현을 했다.

하지만 시대가 변해 어느 정도 기반을 잡고 소득을 올리는 농가에서는 아들이 농사를 이어받기를 바라는 경우도 제법 많아지고 있다. 처음에는 주저하던 자식들도 집안일 거들면서 어른 소득을 보니 욕심도 나고 또 고향에서 농사짓는 선후배들을 보니 서로 재미있게 사는 것 같아 귀농을 결심하기도 한다. 우리 면에도 몇 년 사이 내 또래의 젊은 농사꾼이 제법 많이 생겼다.

귀농한 선후배들은 안 하던 농사일이라 처음에는 힘들어하지만 점차 몸에 배고 어느 정도 자신감이 생겨 농민으로 살겠다는 마음을 먹으면 아내의 마음을 얻어야 하는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농장 근처에서 오순도순 처자식과 함께 살았으면 딱 좋겠는데 죽어도 농촌에서는 못 산다며 버티는 아내를 설득하기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농사의 어려움도 하소연하고 얼마나 열심히 살고 있는지 자랑도 하고 때로는 술김에 고함도 질러보지만 애들 교육문제를 방패막이 삼아 대구·울산·부산 등지에 사는 아내들은 요지부동이다.

저녁이면 면소재지 식당에서 홀아비 아닌 홀아비들이 함께 저녁을 먹으며 가족을 농촌에 데려오려고 연애 때도 안 하던 짓을 한다며 하소연도 하고 아내 흉을 보기도 한다. 도시생활 할 때보다 소득도 나아지고 생활도 훨씬 윤택해진 경우에도 아무리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끈기 있게 설득해도 아내가 아예 들을 생각을 안 하니깐 답답해 미치려고 한다. 한마디로 말이 안 통한다는 것이다. 이제 농사는 조금 알겠는데 도대체 마누라 마음 얻는 농사를 어떻게 지어야 될지 통 모르겠다는 것이다.

지자체 선거를 앞두고 농촌지역도 선거열기가 대단하다.

촛불혁명의 여파인지 보수텃밭인 경상도에서도 진보진영후보와 무소속이 대거 출마하며 유권자들의 표를 얻기 위한 행보가 치열하다. 행사장에서는 물론 큰 길가에서 이마가 닳도록 큰절을 올리기도 한다. 결국 사람들 마음을 얻고 많은 표를 얻는 사람이 당선될 것이다. 그런데 농촌에 살아서인지 나도 나이를 먹어서인지 청년 땐 그렇게 분명하던 옳고 그름이 헷갈릴 때가 많아지고 사람 마음 얻는 게 그리 단순한 일이 아님을 깨달아 가고 있다.

청년 때는 올곧은 사람이 돼야겠다는 마음이 커서인지 어떤 상황에도 굴하지 않고 올바른 소리를 목 놓아 외치는 게 정의고 또 그러면 사람들의 마음을 얻을 줄 알았다. 왜곡된 역사를 바르게 알면 사실관계를 제대로 알기만 하면 기꺼이 내 편이 될 줄 알았다.

귀농 후 동네 골프장 문제, 군 공항 이전 문제 등 많은 일들에 앞장서 싸웠다.

돌아보면 옳은 주장을 한다고 해서, 사리에 맞는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내 편이 돼주고 나를 지지해 주진 않았다. 사실관계를 알리고 옳다고 주장하고 외치는 것만으로는 마음을 얻을 수 없었다. 시골동네 일도 마찬가지다. 당장엔 늙은이라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시지만 사실 수십 년 한 동네에 살면서 웬만한 동네일은 훤히 꿰는 어르신들의 마음을 어떻게든 얻어야 이장도 할 수 있다.

귀농 초기 참 좋은 형님이 있어 술도 자주 먹고 이런 저런 속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한 번은 술이 거하게 취해 “자네 말은 참 옳네만… 이기는 것이 옳은 것이여. 난 옳은 편에 설 거여”라던 그 형님의 말을 잊을 수가 없다. 옳지만 함께 할 수 없다는 말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그것이 현실이었다.

제발 사실이 거짓을 이기고 옳은 것이 그른 것을 이기면 좋겠다. 옳고 그름을 구분해 옳음이 명분을 얻고 마음을 얻어 다수가 되고 권력이 돼서 옳은 편에 많은 사람들이 쉽게 설 수 있으면 좋겠다. 옳음이 이기는 현실에서 살고 싶다.

옳은 것이 이기는 것, 결국엔 마음을 어떻게 얻느냐에 달렸다.

마음을 얻는 농사를 도대체 어떻게 지어야 될지 모르겠지만 오늘도 구슬땀 흘리며 마음 얻는 농사를 짓고 있는 전국 곳곳의 농사형제들의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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