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버스 차장④ 운전기사와 차장

  • 입력 2018.06.01 09:40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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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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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 차장 아가씨, 이 소쿠리 좀 받아 올려 줘.” “아이고 아줌마, 이건 화물차가 아니고 버스예요, 버스.” “아, 오늘이 증평 장날 아녀. 콩도 팔고 찹쌀도 내다 팔고, 씨암탉 한 마리도 팔아야 추석을 쇨 것 아닌감.” “그런데 아저씨, 그 염소를 버스에 태울라고요?” “미안해요 차장 아가씨. 여그서 장터까장 끌고 갈 수도 없고, 염소 한 마리 싣자고 화물트럭을 빌릴 수도 없는 노릇 아녀.” “안 되는데…버스 바닥에다 똥 싼단 말이에요.” “똥 싸면 내가 책임질게.”

1970년대 중반, 충청도 청주에 적을 둔 시내버스의 어느 정류장 풍경이다. 말이 시내버스지 청주는 워낙 시가지가 좁아서 몇 정류장만 지나면 시골길로 접어들었다. 특히 5일 장터로 향하는 버스 안은 소쿠리며 보따리에다 강아지나 돼지새끼 울어대는 소리, 바닥을 굴러다니는 염소 똥 하며…북적대는 장마당과 한가지였다. 그렇다고 가려 태울 수도 없다. 청주는 좁은 바닥이라 어느 버스의 아무개 차장이 불친절하다고 소문이 나면, 그 또한 견뎌내기가 쉽지 않더라는 것이, 당시 차장을 지냈던 박봉자 씨의 회고다.

종점에 도착하면 물을 떠다가 바닥청소를 해야 하는데, 물론 차장의 할 일이다. 겨울철엔 종점의 수도마저 얼어붙어서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그런데 박봉자 씨에 따르면, 한겨울에 버스 바닥의 짐승 똥 치우는 것보다 더 괴로운 일이 있었다. 썩 질이 좋지 않은 버스기사의 상습적인 추행을 두고 하는 말이다.

“박봉자가 참 효녀여. 첨 왔을 땐 솜털이 보송보송하더니만 갈수록 얼굴이 피어난단 말이야. 자, 어디 한 번 안아보자.”

종점 근처나 외진 정류장에 차를 세우고는 노골적으로 추행을 일삼는 기사들이 있었다. 요즘 같으면 성희롱 정도가 아니라 성폭력으로 처벌받을 일이지만, 당시는 워낙 사회적으로 방어 장치가 없던 시절이라 운전기사들의 횡포에 정면으로 맞선다는 것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회사 측에 일러봐야 아무 소용없어요. 회사는 늘 운전기사 편이거든요. 차장이야 한두 사람 그만둬봤자 들어오겠다는 사람이 쌔고쌨지만, 운전수는 그렇지 않으니까요. 나도 몇 번이나 그만둘까 생각했지만 식구들 생각하면 그럴 수도 없고…. 그래서 나름대로 대책을 세웠어요.”

박봉자가 선배한테서 듣고서 실행에 옮겼던 그 대비책이라는 게 매우 단순했다. 희롱조의 언사를 농하는 기사에게는 그가 한 말 보다 몇 배나 더 과격한 말로 되쏘아버리는 것이었다. 그 시기에 박봉자가 문제의 기사에게 쏘아붙였다는 그 말을 글로 옮기기는 어렵다. 안으려 하거나 엉덩이를 만지려 하는 경우 “사촌 오빠가 청주 시내에 있는 복싱 도장에 다니는데, 돌아오는 일요일 오후에, 미들급 권투선수 펀치 한 번 맞아보실래요?”, 그랬단다. 방긋 웃으면서.

그래서 한 때 청주 시내에는 차장들의 동생이나 오라비들이 다니는 권투, 합기도, 태권도, 유도, 쿵푸, 24기…따위의 무술을 가르치는 도장들이 즐비했다고.

기사들이 차장에게 습관적으로 시키는 심부름이 있었다. 버스 노선 중에 한적한 구멍가게들이 있기 마련이다. 정류장이 아닌데도 그 앞에 차를 세운다. “봉자야, 드링크 한 병 사와라!” 그런 경우 득달같이 내려서는 드링크를 사다 대령한다. 그러다 보니 구멍가게 주인은 차장들의 이름을 훤히 꿰고 있었다. 여기서 차장과 가게주인과의 끈끈한 연대가 이뤄지기도 한다. 어느 날 차장이 가게에 들어가서는 지폐 몇 장을 건네며 주인 아낙에게 은근히 말한다.

“아줌마, 이 돈 좀 보관해주실래요? 다음 쉬는 날 찾으러 올게요. 오빠가 면회 와서 주고 간 용돈인데 갖고 있다 들키면 삥땅으로 오해받을까봐.”

하지만 버스 차장 면회 와서 용돈을 주고 간 오빠는 여태 단 한 명도 못 봤다면서 박봉자 주부는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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