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지개발에 삶의 터전 뺏긴 상실감에도 “올해도 모를 심었다”
택지개발에 삶의 터전 뺏긴 상실감에도 “올해도 모를 심었다”
  • 심증식 기자
  • 승인 2018.05.25 12: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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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ㅣ평택 옥길리 마지막 이장 이근랑씨

[한국농정신문 심증식 편집국장]

경기도 평택군 청북면 옥길리. 불과 20년 전만 해도 전형적인 농촌지역으로 평택에서는 오지에 속하는 곳이었다. 버스가 하루에 두 번 밖에 들어오지 않는 곳으로 마을 사람들은 모두 농사를 지었다. 특히 옥길리는 노각(늙은 오이) 주산지였다. 전국 노지 노각의 90%가 옥길리에서 생산된다고 할 정도다. 그러나 이러한 평화롭고 순박한 농촌마을은 평택군에서 평택시로 바뀌고, 청북면이 청북읍으로 승격(?)하면서 농촌의 자취가 사라져 갔다. 옥길리에서 농촌의 자취가 사라져 갔다는 것은 결국 이곳이 고향인 농민들이 떠밀려났다는 이야기와 같다.

옥길리가 변하면서 삶이 바뀌어버린 옥길리 마지막 농민 이장, 이근랑씨를 만났다. “옥길리에서 300년간 대를 이어 살아왔어요. 군대에 다녀온 거 빼고는 단 한 번도 마을을 떠난 적이 없는데 2006년 이주하게 됐죠.”

조용한 시골 오지 옥길리가 어느 날 ‘택지개발 지구’로 지정되면서 대를 이어 농사지으며 살아온 옥길리 사람들은 결국 개발 지구 지정 6년 만에 모두 고향을 등지게 됐다. 이씨는 옥길리에서 가장 마지막에 나온 사람이다.

그가 군대에 있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형님 두 분은 이미 도시에 나가 살고 계시기 때문에 제대를 하면서 선택의 여지없이 아버지께서 하시던 농사를 떠맡았다. 이씨는 20대 초반부터 어머니와 함께 논 1만평, 밭 2,000평 농사를 짓는 성실한 청년 농민이었다. 벼농사와 노각, 고추 농사를 지으며 생활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 어려서부터 하던 농사일이고 젊은 시절이라 힘든 줄 모르고 열심히 농사를 지었다.

“어느 날 어머니랑 장에 나갔는데, 터미널 뒤에서 웅성웅성 하면서 수세 어쩌고 하는 말이 들리는 거예요. 궁금해서 가봤죠. 어떤 분이 ‘수세를 내는 게 부당하다’ 이런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도대체 이게 뭔 소린가, 자세히 들어보니 ‘수세가 일제 강점기에 농민들 착취하려고 만든 거다’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그 소리를 듣고 집에 와서 곰곰이 생각해 봐도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물을 쓰고 물세 내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싶었죠.”

택지개발로 옥길리의 마을과 농토가 사라지기 전, 마지막 이장이었던 이근랑씨가 지난 22일 모내기가 마무리된 논 앞에서 밝게 웃고 있다.
택지개발로 옥길리의 마을과 농토가 사라지기 전, 마지막 이장이었던 이근랑씨가 지난 22일 모내기가 마무리된 논 앞에서 밝게 웃고 있다.

수세 부당성 연설 … 농민회와의 인연

1983년, 이씨가 24세 때 일이다. 장날 듣게 된 평택시농민회 정수일 회장의 수세 부당성에 관한 연설은 그가 세상을 새롭게 보는 계기가 됐다. 지금까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일이 사실은 부당한 일이었다는 말은 실로 충격이었다. 다음날 그는 평택농민회 사무실로 무작정 찾아갔다.

“평택농민회 사람들을 만나서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리고 다음 해에 총선이 있었는데 우리 지역에서 민중당으로 선배가 나왔어요. 유세하는데 가보니까 생전 들어보지 못한 말들이 쏟아져 나오는 거예요. 고무신은 고무신 공장에서 가격을 결정하는데, 고추 값은 농사짓는 농사꾼이 정하지 못하고 왜 장사꾼이 정하느냐? 쌔 빠지게 일하는데 농민들은 왜 이런 대우를 받고 사냐? 한꺼번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으니까 혼란스러웠죠.”

옥길리에서 농사만 짓다가 밖에 나와서 본 세상은 새로운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이씨는 이후 농민회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그 때부터 매일 농민회 사무실에 출근하다시피 했다. 설날, 추석날도 빠짐없이 농민회 사무실을 출근도장 찍듯 나갔다. 사람들을 모아서 부당함을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 농민회원들과 함께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면서 벽보도 붙이고 서명도 받고 유인물을 돌렸다. 이때부터 농사는 전처럼 혼자 짓지 않고 농민회원들과 함께 지었다.

“2~30명씩 어울려서 똘똘 뭉쳐서 농사도 짓고 농민회 일도 했어요. 얼마나 재밌었는지 몰라요. 농민회 활동도 잘되고, 정말 못할 게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역에서 농민회 활동이 소문이 도니까 행정기관에서 휴경지를 소개해줘서 공동 농사도 많이 지었어요. 논밭 많이 얻어서 했죠.”

농민회 활동은 이씨가 농사짓고 살아가는데 의미를 더해 주었다. 여럿이 함께 농민들의 삶이 나아지는 활동, 내 자신이 아닌 우리 농민들을 위한 이타적인 삶을 살아가게 만들었다. 이후에도 그는 지역사회의 각종 문제에 앞장섰다.

1998년을 전후해서 지역에서는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옥길리에 택지개발 사업이 시작된다는 것이었다. 대대로 터전을 지켜온 옥길리 주민들을 들어내고 그 자리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다니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이때 이씨는 옥길리 이장을 맡고 있었다.

“옥길리는 평택에서도 조용하고 외딴 곳입니다. 무성산, 자미산, 자미산성, 비파산성으로 둘러싸인 유서가 깊은 마을인데 이곳을 파헤친다는 것을 마을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없었죠. 동네 사람들이 똘똘 뭉쳐서, 마을 사람 전체가 이주해도 좋다, 하지만 파헤치지 말고 그대로 보전해 달라고 했어요.”

옥길리에 대한 애착이 그만큼 컸다. 이씨는 이장으로 동네 주민들을 이끌고 택지개발 반대투쟁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평택시청에 가서 집회를 했다.

“집회신고를 하고 시청에 가보니 경찰이 딱 막아서 시청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동네 어르신들께서 다음부터는 집회신고 하지 말고 그냥 오자고 하셨어요. 그래서 다음에는 집회신고를 하지 않고 무작정 가서 민원 땜에 왔다고 하니 들여보내 주더라고요. 복도에 가서 자리를 폈죠. 할머니들이 사무실마다 다니면서 ‘여기 뭐 하는 데예요? 시장은 어디가면 만날 수 있어요?’ 하고 공무원들을 귀찮게 했어요. 점심 때 되면 자장면 시켜서 복도에 앉아서 먹고, 할아버지들은 복도에서 담배 피우고, 할머니들은 노래 부르고, 아침 9시에 마을에서 버스 타고 나와서 저녁 6시 차 타고 들어가길 한 달. 시청과 그렇게 싸웠죠. 나중에는 시장이 술 먹고 와서 행패를 부리기도 했어요.”

택지개발 반대투쟁에 앞장서

시청, 토지개발공사 등을 쫓아 다니면서 택지개발 반대, 지구지정 취소를 외쳤다. 그렇게 6년을 싸웠지만 농민과 자본과의 싸움은 승패가 일찍이 정해져 있었다. 개발로 인한 엄청난 이권을 챙기려는 자본의 힘 그리고 도시개발이라는 성과를 자신의 치적으로 삼으려는 정치권력의 강력한 동맹 앞에 옥길리 사람들의 싸움은 돌파구가 없었다.

“개발하려는 자들은 터전을 잃은 사람들의 삶은 안중에도 없어요. 그저 보상하면 되지 않냐고 하는데 그 보상금 가지고 다른 곳에 새로 터전을 꾸릴 수도 없고, 고향을 잃은 옥길리 사람들의 허탈감을 무엇으로 보상할 수 있겠어요.”

옥길리 사람들은 당시에 옥길리를 지키기 위한 싸움뿐만 아니라 인근의 비슷한 투쟁도 함께 했다. 가깝게는 대추리 미군부대 이전 반대투쟁에도 적극적으로 힘을 보탰다.

“대추리 싸움도 같이 했어요. 하루는 옥길리에서 하루는 대추리에서 버스를 타고 다니면서 싸웠지요. 그 뿐 아니라 매향리 미군 사격장 반대투쟁도 다녔고, 옥길리 택지개발지구 285만평 중 60만평에 골프장을 건설한다 해서 전국골프장대책위원회에도 참여했지요.”

옥길리에서 농사만 짓던 농민들은 어느덧 투쟁의 전사가 됐다. 옥길리를 지키기 위해 나섰던 발걸음이 같은 처지에 고통을 받는 이들과 자연스레 함께 하게 된 것이다. 옥길리 사람들은 6년 동안 분열되지 않고 똘똘 뭉쳐 싸웠다. 거기에는 이근랑 이장의 헌신적인 활동이 큰 힘이 됐다.

이씨는 옥길리에서 끝까지 버티다가 마지막으로 여든이 다 된 노모를 모시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길을 다 막고 흙으로 둘러쌓아서 살 수가 없게 만들더라고요. 결국 어머니 모시고 나왔죠.”

옥길리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무성산 자락에 옹기종기 모여 누대에 거쳐 농사를 업으로 삼고 살아온 옥길리 사람들은 도시를 전전하며 새로운 삶을 꾸려가야 했다. 보상금이 크던 작던 그것은 이들이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밑천이기 보다는 화근이 되는 경우가 더 많았다.

“보상금이 많이 나온 집은 형제들 간에 분쟁이 나고 적은 집은 삶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됐어요. 보상금으로 새로운 일을 하겠다고 하다가 속아서 재산 다 날리고 셋방을 전전하는 이도 있어요.”

그 뿐 아니라 고향을 잃은 이들의 상실감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다.

“옥길리를 떠나면서 어머니가 제일 걱정이 많이 됐지요. 농사일로 소일하시면서 이웃집 다니고 어울리며 평생 살아오셨는데 익숙한 고향을 떠나 아는 이 하나 없는 낯선 곳에서 집안에서만 보내야 하니 얼마나 힘드시겠어요.”

개발로 인해 삶의 터전에서 밀려난 사람들 다수는 전보다 더 힘겨운 삶을 살아간다. 특히 농촌지역은 대다수가 노인으로 평생을 살아온 익숙한 시·공간에서 밀려난 낯선 삶을 새로 꾸려간다는 것 자체가 고통이다. 옥길리도, 미군부대가 들어선 대추리도 이제 이들에게는 돌아갈 수 없는 곳이 돼 버렸다. 굽이굽이 마을을 이어주던 길과 삶의 터전이 돼 주었던 논밭은 중장비로 뭉개졌다. 이제 그들의 고향은 사진 속에서만 남아 있을 뿐이다.

“옥길리에서 나오신 분들 대부분이 7~80대입니다. 이 분들이 시내에 나와 뭘 하겠어요. 아무것도 못하고 방에 갇혀 있는 거죠. 옥길리에서 살았으면 농사 쉬엄쉬엄 짓고 마을 사람들과 어울려 살텐데. 도시에 나와서 사람들이 황폐해 지는 거예요. 몇 푼의 보상금을 주면서, 밀려난 사람들의 생계나 심리를 생각해 봤는지 묻고 싶어요.”

개발 앞에 삶이 무너진 사람들은 비단 옥길리 사례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한 개인의 삶과 역사는 인정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이 가지고 있는 땅만 헐값에 정산하면 그만이다. 이것이 법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고 있는 것이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인 것이다.

옥길리 주민들도 예외 없이 그들의 터전을 평당 9~10만원에 강매 당했다. 그리고 그 땅은 적게는 수십 배에서 많게는 수백 배의 가격이 매겨진다. 이러한 엄청난 이윤이 있는데 옥길리 주민들의 삶이 존중될 수 있을까?

옥길리 이장 이근랑씨의 임기는 2006년 옥길리를 떠나면서 끝이 났다. 하지만 지금도 매일 옥길리에 간다. 택지개발지구에 들어가지 않아 남은 논에 올해도 모를 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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