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원의 농사일기 50] 만날 속고 살아요

  • 입력 2018.05.25 10:48
  • 수정 2018.05.25 10:51
  • 기자명 윤석원 중앙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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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원<br>중앙대 명예교수

우리 마을 이장님은 나의 농장 맞은 편 200여평의 밭을 임차하여 참깨 농사를 하신다. 아랫마을에 사시지만 자주 올라오시고 이런 저런 얘기도 가끔 한다. 3주 전에 심은 고추모종이 자리를 잡지 못해 걱정이라고 했더니 날씨가 최근 몇 주 동안 너무 추워서 그렇다면서 우리 농민들은 ‘만날 속고 산다’고 하소연 하신다.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 간다. 하우스 농사가 거의 없는 이곳 양양지역은 대부분의 농사가 날씨와 기후 환경 등에 그대로 노출되어 자연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아침에 눈뜨면 제일 먼저 검색하는 것이 일기예보다. 벼농사, 과수농사, 채소농사, 옥수수농사, 감자농사, 산채농사 등이 다 그렇다. 비가 오면 오는 대로, 안 오면 안 오는 대로, 기온이 오르면 오르는 대로, 낮으면 낮은 대로, 바람이 거세면 거센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습도가 너무 높으면 높은 대로, 낮으면 낮은 대로 항상 마음 졸이며 농사짓고 있다.

뿐만 아니라 벌레가 너무 많아서 걱정이고 균이나 바이러스는 또 왜 이리 많은지 조마조마 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 어려운 것은 자연 현상을 전혀 예측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공장에서 생산한다면 적어도 자연 환경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예측도 가능하다. 그러나 하우스나 공장 농사가 아닌 한 자연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고 생산 초기단계에서는 앞으로 생육과정에서 어떻게 될 지 알 수가 없다. 그럼에도 봄이 되면 생산은 시작된다. 자연 환경이 좋을 것이라 믿고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것이니 농민은 맨날 속고 산다는 의미이지 않을까 싶다.

더군다나 봄에 씨 뿌리고 모종심고 나무 키우기 시작하지만 수확기에 가격이 얼마나 될 지 알 수가 없다. 지난해에는 고추 가격이 괜찮아 고추농사를 시작하였지만 금년 가을 수확기 가격은 또 어떻게 될지 알 수가 없다. 내가 생산하려는 미니사과 가격이 가을에 어떻게 될지 알 수가 없다. 내가 생산하는 제품의 가격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시작되는 것이 농사다. 그러나 대부분의 농민들은 봄에 농사를 시작하면서 금년에는 가격이 좋을 것이라 기대한다. 기대하지 않고 생산을 시작하는 농민은 없을 것 같다. 그렇게 봄이 되면 또 농사일을 시작하는 것이 농심이다.

결국 봄에 품었던 기대가 수확기에는 실망으로 바뀌는 해가 한두 해가 아니었을 것인데도 ‘또 속는다’는 기분으로 농사일을 놓지 못하고 있다. 이게 현실이다. 당장 관두고 싶어도 딱히 할 일이 마땅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실망하더라도 봄이 되면 또 괜찮으려니.

속고 사는 기분으로 하루하루 농사일을 한다는 것은 자조적인 냉소가 아닐까. 우리사회는 ‘농민은 국민의 먹거리를 생산하고 지속가능한 자연 환경을 보존하고 농촌 공간을 지키며 국가의 근본을 책임지고 있다’는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농사일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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