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버스 차장① 누이를 위하여

  • 입력 2018.05.11 13:15
  • 수정 2018.05.13 21:02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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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이상락 소설가

1970년대 초에 상경하여 처음 서울의 시내버스 차장을 보았다. 파란 유니폼을 산뜻하게 차려 입고 ‘오라이, 스톱!’을 외치는 그 모습은 촌놈인 내 눈엔 썩 멋져 보였다. 투박하고 우중충한 시골 버스의 남자 차장과는 견줄 바가 아니었다. 역시 서울은 서울이었다.

그러나 사춘기적 나의 가슴을 설레게까지 했던 처음의 그 모습이 버스 차장의 모두는 아니었다. 출입문 바로 옆의 전용 좌석마저 승객에게 빼앗기고, ‘오라이’와 ‘스톱’ 사이의 그 짧은 시간을 못 참아 문짝에 기대 꾸벅꾸벅 졸고 있는 지친 모습을 보았을 때, 문이 닫히지 않을 정도로 불어터질 것 같은 만원버스의 출입구에 간당간당 매달려 가는 모습을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면서…그들은 이미 멋진 천사가 아니라, 모 심고 밭 매고 나뭇단을 머리에 인 고향 마을의 누이들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알아버렸다.

한문 수업 시간에, 선박의 선장이나 비행기의 기장은 ‘긴 장(長)’자를 쓰지만 버스나 전차의 차장은 ‘손바닥 장(掌)’자를 쓴다는 사실을 처음 배웠다. 시험에 그 문제가 출제됐을 때 나는 그 두 글자의 쓰임새를 결코 헷갈리지 않았다. 왜냐면, 버스 차장이 출입문 위쪽 벽을 손바닥으로 ‘탕!’ 한 번 치면 멈추라는 신호요, ‘탕탕!’ 두 번 치면 출발하라는 신호라는 걸 이미 간파해버렸던 것이다. 손바닥은 차장의 매우 중요한 노동수단이었다.

우리나라에 최초로 노선버스가 등장한 때는 1912년이었다. 경상도의 대구에서 경주를 거쳐 포항에 이르는 거리를 부정기 버스로 운행한 것이 그 시초였다. 40년대 말에는 군용트럭을 개조한 시내버스 500여 대가 서울 시내에서 운행됐다. 버스 운행이 본격적으로 활발해진 것은 50년대 중반부터였다.

그러나 50년대 말까지만 해도 타고 내리는 문이 버스의 앞쪽과 뒤쪽 두 곳에 있었고, 요금을 받는 차장도 남자였다. 그러던 것이 60년대에 들어서면서 여자 차장으로 바뀌기 시작했고, 더불어서 버스의 끝부분에 붙어 있던 뒤쪽 출입문은 가운데로 옮겨졌다. 그러니까 본격적으로 여자 차장들이 승객의 승하차를 안내한 것은 1960년대부터라고 보면 될 것이다.

내가 버스 차장 경력이 있는 사람을 찾아 옛 시절의 얘기를 듣고자 취재에 나섰던 때가 2001년 초였는데, 그러나 마땅한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사실은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여성들이 왕년의 버스 차장 경력을 떳떳치 않게 여겨서 감추려 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한 사람을 만났다. 1970년대 말에 충북 청주에서 시내버스 차장으로 일했던 박봉자씨가 그 사람이다. 1961년생이니 내가 만났을 때 그의 나이가 마흔이었다.

“77년도에 중학을 졸업했어요. 사촌언니가 서울에서 재봉사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도 서울에 가서 미싱 기술을 배우려고 했지요. 그런데 부모님 생각은 달랐어요. 그때 바로 아래 동생 봉식이가 중3이었고 셋째 봉남이가 중2였기 때문에, 장차 그 두 동생 뒷바라지를 내가 해야 했어요. 그러니 무슨 기술을 배우고 익히고 할 여유가 없다, 당장 돈벌이를 해야 한다, 그래서 버스 차장으로 들어간 것이지요.”

이 열일곱 살짜리 소녀는, 두 남동생이 대학 졸업할 때까지의 학비를 자신이 책임질 것이니 걱정 말라고 큰소리를 치고는, 씩씩하게 집을 떠나 청주시 봉명동에 있던 ‘대한운수’에 취업을 했다.

“기숙사에 들어갔는데, 물론 내가 젤 막내였지요. 함께 지내게 된 차장 언니들 사정을 들어보니 다들 형편이 비슷비슷했어요. 재밌는 게, 나처럼 남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차장을 하고 있는 언니들이 대부분이었다니까요.”

그 시절의 누이들은 참 마음씨가 고왔다. 아니, 심성이 착해서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남자형제들의 학비 뒷바라지를 감당해야 했으니, 달리 보면 강요된 미덕의 희생자들이었다. 그 세월을 건너온 사내들은 다시 한 번 누이들에게 감사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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