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고령 여성농민의 명복을 빕니다

  • 입력 2018.05.04 09:54
  • 수정 2018.05.13 21:01
  • 기자명 구점숙(경남 남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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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점숙(경남 남해)
구점숙(경남 남해)

며칠 전 영암지역에서 참 어이없는 교통사고가 났습니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사망자가 발생했고, 하필이면 농사 일당벌이 나갔다가 귀갓길에서 당한 사고인지라 안타깝고도 애석하기 짝이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그 사고의 이면으로 한국농업의 현주소를 보게 되니 더욱 참담합니다.

버스에 탑승했던 분들이 대부분 7~80대 고령의 여성농민들인 만큼 젊어서부터 평생을 골병이 들도록 농사일을 하신 분들입니다. 그분들의 뒷모습이 어떠했는지 안 봐도 뻔합니다. 옆으로도 휘어지고 거기에다 앞으로도 굽은, 바로 내 이웃들의 모습이니까요. 얼굴이 보이지 않는 새벽 어스름이나 해거름 저물녘에 실루엣만으로도 누가 누군지를 구분할 수 있습니다.

어느 각도로 얼만큼 굽은 정도에 따라 정확히 알아낼 수 있지요. 자세는 곧 그 사람의 삶을 말해줍니다. 전 세계 어디에서도 이런 척추자세를 가진 분들을 만날 수는 없습니다. 그만큼 우리나라 여성농민들의 노동 강도가 세다는 말이고 그만큼 인내심도 강해서 만들어진 자세입니다.

2017년 농가평균소득이 3,900만원선에 근접했다고(내심 자랑삼아 붙인 제목인 듯) 농민지 뉴스 머리기사는 전합니다. 하지만 농가 평균소득과 상관없이 66.8%가 1,000만원 미만의 농업소득이요, 70세 이상 농가 경영주가 41.9%입니다. 말하자면 고령의 농민들이 한국의 농업을 버티고 있다는 것입니다.

언론에서는 손주들 용돈이라도 줄 요량으로 일을 나갔다가 당한 참변(이런 제목이면 소득 3만불 시대에 맞게 그림이 좀 그럴싸하게 나올까요?)이라 하지만 실제로는 생계비용에 가깝습니다. 자식들이 다 떠난 농촌에서 월 20만원의 노령연금만으로는 가계를 유지하며 존엄을 지키기는 어려우니까요.

노령화된 농촌은 자연발생적인 결과가 아니라 정부의 농산물시장 개방정책과 기계화·규모화 정책이 가져온 결과입니다.

기계화율 94%를 자랑하는 쌀농사 외의 대부분의 농사가 7~80대 고령 여성농민들에 의해 완성된다고 보면 정확합니다. 밭작물도 55%의 기계화율을 자랑하지만 사람의 손으로만 따야 하는 새콤달콤 무른 딸기도, 봄날 한꺼번에 솎는 배·사과꽃도, 한없이 고급스런 삶을 완성시켜주는 수제 녹차도, 월동 이모작 마늘·양파 심기도 죄다 기계는 못 따라할 불편한 자세를 취하고서 익숙하고도 재빠르게 놀린 값진 그들의 손이 만들어 냅니다.

추측컨대 만약 우리가 먹는 농산물 중, 그들의 손을 거치지 않고 생산된 것을 먹는 자만이 천국으로 갈 수 있다고 한다면 아무도 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 가슴 아프고 황망합니다. 평생을 농사 지어온 그분들에게 ‘당신들이 있어 우리 사회가 그 혼란함 속에서도 사회 안정과 국가발전이 가능했다'는 영광 대신 소작농도 아닌 일용농으로 생을 마감하게 한 이 미안함을 무어라 해야 할까요?

하루 세 끼를 먹고 사는 국민 모두가 이렇게 보내드려서 정말 죄송하다고 사죄라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는 버스 기사만을 탓하는 대신 한국농업의 현실과 그 구조적인 모순을 낱낱이 헤쳐서 새로운 대안을 만들어야할 것입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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