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시절 우리는] 김삿갓 방랑기⑤ ‘김삿갓 방랑기’는 왜 방랑하였나

  • 입력 2018.05.04 09:52
  • 수정 2018.05.13 21:01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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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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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에 남과 북에서 동시에 발표된 <7.4 남북공동성명>은 5분 드라마 <김삿갓 북한방랑기>에도 큰 변화를 요구했다. 무엇보다 공동성명 안에 「상대방에 대한 중상과 비방을 금한다」는 조항이 포함돼 있었던 것이다. 날이면 날마다 북녘의 권부와 체제에 대한 ‘중상과 비방’으로 먹고 살아온(?) 터에 그것을 하지 말라니, 이제 어찌 할 것인가?

더구나 <7.4 성명> 직후엔 이런 일도 있었다. 당시 김삿갓 역을 맡아 연기했던 성우 김현직의 회고담을 들어보자.

“하루는 녹음을 하려고 모두 스튜디오에 모여 있었는데 중앙정보부에서 파견한 우리 프로그램 담당 요원이 나를 보더니 김형은 이제 큰일 났어요, 그러는 거예요. 이유를 물었더니, 김일성의 밀사로서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러 내려온 북한의 박성철 부수상이 청와대 만찬에서 정보부 관계자에게 ‘그 김삿갓 역할 하는 배음사(配音士, 성우) 일꾼은 나이가 어드렇게 됩네까?’ 하고 묻더래요. 그 말 들으니까 소름이 쫙 끼치더라고요.”

김삿갓의 입을 빌려 거의 매일이다시피 지존인 김일성 주석을 이놈, 저놈…하며 호통치고, 조롱하고, 비방했는데…그 방송을 북녘의 최고 권력층에서 빠짐없이 듣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소름이 끼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프로그램의 구성이 어떻게 바뀌었을까? 조원석 전 KBS 라디오 본부장의 얘기.

“프로그램 들머리에서 읊던, ‘땅덩어리 변함없되…’로 시작해서 ‘어찌타 북녘 땅은 핏빛으로 물들었나’로 끝나던 그 시는 물론 없앴지요. 그리고 화요일과 목요일은 김삿갓을 철조망 너머 북한으로 보내지 않고 남한의 병영으로 보내서, 군 내무생활의 미담을 소개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꾸려갔어요. 나머지 요일에도 북한의 권부를 직접적으로 비난하는 내용을 지양하고 북한의 언어나 문화…등을 소개하는 포맷으로 바꾼 것이지요. 이름도 <5분 드라마 김삿갓 북한방랑기>에서 <5분극 김삿갓 방랑기>로 바꿨고요.”

그 바람에 북한 주민을 괴롭히는 악질 내무서원 등의 역할을 맡아 고정 출연했던 성우 조달호와 매회 김삿갓 앞에 슝, 나타나서는 ‘삿갓어른!’ 하며 북녘의 실태를 고자질하는 역할을 맡았던 여자성우 정민희는 생계의 위협(?)을 받게 되었다고 회고하며 웃었다.

1994년 4월 3일, <김삿갓 방랑기>는 1만 회 특집을 방송했다. 이를 계기로 또 한 번 방향을 바꿔야 했다. 이즈음에는 신문은 물론이고 TV에서도 북한소식을 생생하게 전해주는 프로그램이 고정 편성되어서 보도되고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5분짜리 라디오 드라마 형식으로 국민을 계몽시킨다는 것이 시대조류에 맞지 않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 동안 방송해오던 KBS 1라디오를 떠나 심야 대북방송인 사회교육방송으로 채널을 옮겼다. 그러자 방송국 전화통에 불이 났다. 12시 55분에 딱 맞춰서 해야지 오밤중에 하면 그것이 무슨 김삿갓 방랑기냐…는 내용이 주류였다. 무엇보다 <김삿갓…>이 그 동안 온 국민에게 시보역할을 해온 탓에, 사람들은 마치 차고 있던 시계를 잃어버린 것처럼 서운해 했다. 심지어는 방송국에 침투한, ‘사상이 불그스름한 사람들’의 소행이 아니냐고 따지기도 했다.

그리고 다시 세월이 흘렀다. 서기 2000년 6월에 대한민국의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하여 ‘북한괴뢰도당’의 수괴가 아니라 ‘조선인민공화국’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 역사적인 <6·15 남북공동선언>을 발표하였고, 이듬해인 2001년 봄에 <김삿갓 방랑기>는 사회교육방송에서마저 자취를 감추었다.

이제는 무덤을 뚫고나온 신출귀몰한 김삿갓을 통하지 않고도 제한적이나마 남과 북이 상호간에 호상간에 서로 왕래하면서, 주민들이 살아가는 실상을 읽을 수 있는 길이 트인 것이다.

19세기 중후반에 세상을 떠났던 김삿갓은, 본의 아니게 분단시대의 한반도에 소환되어 36년 동안이나 이어온 방랑을 접고, 이제 역사 속의 시인 김병연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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