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여년 일관된 운동가의 삶 “농민운동은 평생의 일”

이 사람 ㅣ 전남 보성 농민운동가 최영추씨

  • 입력 2018.04.22 08:27
  • 수정 2018.04.22 19:34
  • 기자명 심증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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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심증식 편집국장]

2015년 11월 14일 백남기 농민은 경찰이 조준발사한 살인적인 물대포에 쓰러졌다. 그리고 300여일 동안 서울대학교병원 중환자실에서 사경을 헤매다 사망했다. 백남기 농민의 사망은 무도한 박근혜정권의 종말을 알리는 신호였다. 백남기 농민의 사망 이후 연이어 벌어지는 사태는 박근혜 정권의 말기적 발악이었고 국민들은 용서하지 않았다.

전남 보성군 웅치면 농사꾼 백남기 농민을 추모할 때마다 등장하는 인물이 있다. 노동면에 사는 최영추 전 보성군농민회장이다. 고 백남기 농민이 11월 14일 서울 민중대회에 참석하기까지의 과정을 들어본 사람이라면 다 알고 있는 이야기가 있다. 원래 민중대회날인 11월 14일 백남기 농민은 다른 일정이 있어서 집회에 참석할 수 없었다. 그런데 최영추 회장이 이번 집회에 꼭 가자고 권유로 함께 상경했다는 것.

최 회장을 만나러 전남 보성으로 갔다. 한반도 남쪽에 위치한 보성에는 완연한 봄이 왔다. 보성읍내에서 벗어나니 논밭이 펼쳐지고 농로 길을 따라 야트막한 산(?)길로 들어서니 입간판이 눈에 띈다. 다채농원, 최 회장이 가꾸는 농장이다. 농장 안에 들어서니 한쪽에 잘 지어진 주택 겸 농막이 있고 앞에는 넓은 잔디밭이 펼쳐진다. 농사를 짓는 농장이라기보다는 공원 같은 느낌이다.

농막에 자리하자마자 최 회장은 백남기 농민이 11월 14일 서울에 가게 된 이야기를 담담하게 이어갔다. “11월 13일 저녁에 우리 집에서 자연재배 농법 모임이 있었어. 남기형님도 오셔서 내일 집회 안 가실라우? 물었더니 선약이 있다고 하셔서 내가 ‘박근혜가 아버지처럼 장기집권하게 생겼소. 숨도 못 쉴 세상으로 돌아가려 하니 형님 가셔야할 것 아뇨’ 했더니 가시겠다고 했어.” 이렇게 백남기 농민은 농민운동 동지이고 후배인 최영추 회장의 권유로 민중대회에 참석하게 됐고, 11월 14일 사건이 터진 것이다.

지난 15일 전남 보성군 노동면 자택 앞에 선 최영추 전 보성군농민회장이 인터뷰를 하며 옛 기억을 떠올리고 있다.
지난 15일 전남 보성군 노동면 자택 앞에 선 최영추 전 보성군농민회장이 인터뷰를 하며 옛 기억을 떠올리고 있다.

학생운동·순탄치 않았던 농사

그는 원래 도시 태생이다. “광주 출신이야. 대학 다닐 때 학생운동을 좀 했지.” 전남대 72학번이라고 한다. 박정희가 유신헌법으로 장기집권에 들어가는 시기에 대학에 다녔다. 70년대 초 학생운동의 맹아가 싹을 틔우던 시기에 그는 전남대학교에서 학생운동을 이끌어 왔다. 유신말기 긴급조치 시기에 온전히 대학을 다닐 수 없었다. 결국 1979년 구속됐다. 그해 말 10.26 사건이 나고 1980년 봄이 되자 정부는 구속된 민주인사를 대거 석방하게 된다. 이때 그도 출소하게 됐고, 학생운동을 같이하던 친구 4명과 농민운동을 하고자 영광으로 내려가 협동농장을 꾸려 농사를 시작했다.

“수박 농사 1만평을 지었어. 그런데 5.18이 터진 거야. 처음에 소식을 듣고는 책을 땅에 묻고 원불교 교당에 들어가 숨어있었어. 그런데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 변란이 일어났는데 숨어 있을 수만은 없어서 광주 진입을 시도했어.”

5.18 당시 광주시민들과 함께하기 위한 이들의 광주진입 시도는 군의 봉쇄로 실패했다. 광주가 봉쇄되자 농사에도 차질이 생겼다. 수박 출하가 막힌 것이다. 결국 썩 잘 된 수박을 밭에서 썩혀 버려야 했다. 그와 친구들의 첫해 농사는 5.18과 더불어 허망해졌다. 게다가 1년간 공을 들여 황무지를 농지로 만들어 놓았는데 밭주인에게 빼앗겨 버렸다. “땅을 만들어 놓으니까 주인이 욕심을 부리는 거야. 5년 계약을 했는데 1년 만에 내놓으라고.”

결국 영광을 떠나 광주로 돌아와 모색을 하던 중에 선배로부터 제안이 들어왔다. “자기 땅이 5만평 있는데 자기랑 같이 농사짓자고 해서, 그 선배까지 4명이서 다시 시작했지. 그 당시에 해남 황산이라는 곳에 트랙터가 한 대 있었는데 그걸 빌려서 땅을 개간하고, 해남축협 비육농장에서 축분을 4.5톤 차로 100차를 퍼다 거름을 했어. 그렇게 해서 5만평에 할머니 50명을 얻어서 콩을 심었지.”

갖은 고생과 노력을 쏟아 부어 해남에서 농사를 다시 시작했지만 역시 순탄치 않았다. “산 밑에 밭이라 콩을 심으니까 비둘기와 꿩이 달려들어서 쪼아 먹기 시작하는데 남아나는 게 없었어. 반도 수확을 못했어.”

고생고생해서 새로 시작한 농사는 본전도 찾지 못하게 되어 한 해 만에 정리하게 됐다. 그리고는 광주 인근에서 느타리농사를 지으며 몇 년을 지내다 후배의 권유로 보성에서의 삶이 시작됐다. 처음에는 후배가 산 2만평의 땅을 개간해 같이 농사를 지었다. 그러나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후배 집안문제로 땅이 남의 손에 넘어갔다.

“갑자기 쫓겨나게 됐지. 막막했는데 집안 형님이 땅을 사줄 테니 관리를 하라는 거야. 그래서 거기서 밭 1만평, 논 1,500평 농사를 지었어. 길 옆 논인데 유기농 한다고 제초제를 안 하니 논에 피반 나락 반 아니겠어.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농과대 나와서 농사 저렇게 짓는다고 손가락질 했지만 난 고집스럽게 유기농 농사를 지었어.”

2016년 11월 6일 경찰의 물대포에 맞아 사경을 헤매다 사망한 고 백남기 농민의 유골이 광주광역시 북구 망월동 민족민주열사묘역에 안장되는 사이 최영추 전 회장이 슬픔에 겨워 흐느끼고 있다. 한승호 기자
2016년 11월 6일 경찰의 물대포에 맞아 사경을 헤매다 사망한 고 백남기 농민의 유골이 광주광역시 북구 망월동 민족민주열사묘역에 안장되는 사이 최영추 전 회장이 슬픔에 겨워 흐느끼고 있다. 한승호 기자

유기농 한 길만 고집했던 세월

대학을 졸업해서 첫 농사부터 그리고 보성에 내려와서도 유기농만 고집했다. 그 당시만 해도 유기농은 아주 소수의 사람들만 하던 시절이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지만 최영추 회장은 유기농의 개척자로 논밭을 일궜다.

집안 형님 땅에서 농사를 짓게 되면서 그는 비로소 안정적인 농사를 짓게 됐다. 생활이 안정되자 본격적인 농민운동을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에 가톨릭농민회 활동을 하게 됐다. “1986년부터 가톨릭농민회 활동을 하면서 가농·기농의 그늘이 아니라 자주농민회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으로 자주농을 건설하기 위한 활동을 했어. 그러다가 6월 항쟁을 만나게 됐지.”

1987년 6월 10일을 기해 전국 주요 도시에서는 ‘독재타도’, ‘직선제 개헌’을 내건 민주 대항쟁이 시작됐다. 이 때 전남 보성의 농민들은 광주를 오가며 6월 항쟁에 참여했다.

“출근투쟁을 했어. 6월이 바쁜 농사철이라 낮에 일을 하고 오후 5시에 보성역에 모여 기차를 타고 남광주역으로 나갔어. 광주시내 곳곳에 흩어져 집회에 참석하고 11시 30분에 남광주역에 다시 모여서 국밥 한 그릇 먹고 00시 07분차를 타고 보성역에 돌아오면 새벽 1시야. 6월 항쟁 내내 그렇게 투쟁을 했어.”

농사일을 마친 농민들은 광주집회장에 꼬박꼬박 ‘넥타이 없는’ 출근 투쟁을 한 것이다. 집회가 없는 농촌지역의 뜻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렇게 다양한 방법으로 거점 도시에 모여 6월 항쟁에 참여했다. 6월 항쟁이 서울에서 넥타이부대(?)의 합류로 전기를 맞았다. 하지만 전국 방방골골에서 농민들은 낮에 일하고 밤에 투쟁하는 농민적 투쟁으로 역사의 물꼬를 바꿔 놓았던 것이다.

6월 항쟁이 끝나고 최 회장은 9명의 활동가들을 규합하여 자주적 농민회를 만들게 된다. 그간 가톨릭농민회, 기독교농민회라는 종교를 바람막이로 해서 시작된 농민운동은 자주적 농민회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자생적 농민회의 출현은 이후 전국농민회총연맹 건설의 중추가 됐으며 농민운동이 대중운동으로 발전하는 기반이 됐다. 전남 보성에서는 최 회장이 그 중심에 섰다. 이 때 초대 보성군농민회장을 맞은 이가 이후 전국농민회총연맹 의장을 역임한 문경식이다.

한편 보성지역에서 농민운동을 이끌어 왔던 가톨릭농민회는 생명운동으로 전환했고 그 중심에 백남기 농민이 있었다. 농민운동의 전국적 인물인 문경식, 2015년 11월 14일 민중대회에 경찰의 물대포에 쓰러진 백남기 등과 함께 최 회장은 보성에서 초창기 농민운동을 이끌어 왔다. 이들은 백남기, 최영추, 문경식 순으로 2살 터울 선후배지간이다. 이들은 농민운동 동지로 최 회장이 보성에 내려오면서부터 2015년 11월 14일 백남기 농민이 쓰러지는 순간까지 함께 활동을 했다. 지금은 남은 이들이 백남기 농민의 유지를 이어가고 있다.

“나는 먹물이고 자유주의적 기질도 있고 해서 장을 맡는 거 싫어했어. 1992년 보성군농민회를 만들면서 문경식 의장님을 초대 회장으로 세웠지. 문 의장님은 나보다 2년 후배지만 내가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야. 그분이 학력은 없지만 열정, 신념, 도덕성, 판단력 등 지도자로써 탁월한 능력을 가진 분이야. 도연맹 의장 제안이 들어 왔을 때도 부담스러워 했는데 문 의장님이 가야 전농이 바로 선다고 내가 적극 밀었지. 이후 전농 부의장, 의장을 맡아서 훌륭하게 해냈어. 난 지금도 ‘의장님’이라고 불러.” 보성군농민회가 만들어지고 농민회는 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농민단체로 자리매김 하게 됐다. “참 잘나갔어. 서울대회하면 보통 버스 20대씩 갔었으니까.”

그러나 19대 총선에서 통합진보당 사태가 터지면서 보성군농민회에 시련이 닥쳤다. 19대 총선에서 문경식 전 전농 의장이 통합진보당 비례대표로 출마했는데 선거 이후 비례대표 선거부정 사건이 터지면서 검찰은 무차별적인 수사를 진행했다. “보성에서 150명이 검찰에 불려가서 조사를 받았어. 그중에 15명은 벌금을 맞고 그 일로 농민회는 위기를 맞게 됐어.”

여기에 보성군농민회가 운영하던 농민주유소까지 파산하게 됐다. “농민주유소가 파산되니 농민회원들의 출자금은 다 날아가고 당장 갚아야 하는 부채가 9,000만원이 넘었어. 나, 문 의장 그리고 당시 회장, 부회장이 2,000만원씩 내서 정리 했어.” 시련에 시련이 겹치면서 농민회는 점점 위축돼 갔다. 위기를 조금씩 털어내면서 농민회를 추스리던 와중에 2015년 백남기 농민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남기 형님이 중간불 질러서 좋은 세상 갈 기미가 보이니까. 그게 위안이지. 문재인이라도 대안으로 나와 지금 남북문제를 담대하게 풀어나가니까 다행이야. 전쟁이 나면 안 돼. 모두가 공멸이야.”

1970년대 대학시절 학생운동으로부터 그의 삶의 자세는 이후 40여년을 일관되게 유지해 왔다. 학생운동에 이어 농민운동을 지속하고 있으며 농사는 유기농을 고집하며 한 치도 흐트러짐 없는 운동가의 삶을 유지하고 있다. 이제는 농사는 딸에게 물려주고 농장 풀 깎는 일만 한다고 하다. 농사 일선에선 한발 물러섰지만 그가 놓지 않는 것이 농민운동이다.

“농민운동은 내 평생의 일이니까 계속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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