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김삿갓 방랑기④ 김삿갓 역 맡은 성우의 신변을 보호하라!

  • 입력 2018.04.22 08:22
  • 수정 2018.05.13 21:04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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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삿갓 북한방랑기>에서 주인공 김삿갓은 거의 매일 북한의 최고 지도자를 향해 거의 욕설에 가까운 비난을 퍼부었다. 프로그램이 처음 시작될 때 시그널과 함께 흘러나오는 ‘땅 덩어리 변함없되 허리는 동강나고…’라는 시 낭송 말고도 끝날 때에도 그 날의 내용에 맞는 시 한수를 읊었는데, 그것은 시라기보다는 차라리 저주에 가까웠다. 실제로 1987년 2월 16일에 방송했던, <5분극 김삿갓 방랑기 ‘그림 속의 쌀밥’>의 마지막 부분은 이러하였다.

이상락 소설가
이상락 소설가

말로써야 천하성군 누구인들 못 하랴만 / 뻥긋하면 위한다고 지시 교시 떠벌이나 / 치다꺼리 허덕이며 어쭙잖게 꾸며 놓으면 / 쥐뿔 나게 싸다니며 치적자랑 시키나니…

1980년대 후반이면 60~70년대보다 그 내용이 훨씬 부드러워졌는데도 북측의 최고 지도자를 향해 ‘떠벌인다’거나, ‘쥐뿔 나게 싸다닌다’는 따위의 거친 표현들을 구사하고 있다. 물론 북한의 방송 역시 남한의 국가 원수를 향해 입에 담지 못할 말들을 연일 쏘아댔었다.

어쨌거나, 남북이 이처럼 송곳처럼 대치하고 있던 세상이라 김삿갓 역을 맡았던 성우는 신변상의 두려움을 가질 만도 했다. ‘제2대 김삿갓’이었던 성우 김현직씨는 이렇게 회고한다.

“정보부(뒷날 안기부)에서 저한테 특별히 전화번호 하나를 지정해 주었어요. 무슨 일이 생기면 이 번호로 전화해라, 지방에 있든 서울 어디에 있든 5분 이내에 출동해서 보호해 주겠다, 라면서….”

그러면 실제로 김삿갓 역을 맡았던 성우 본인은 매일 긴장감 속에서 떨며 지냈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그는 말술을 마다않는 술꾼이었는데, 그의 친구들 사이에서는 “공술 얻어먹고 싶으면 김현직을 데리고 다녀라”라는 말이 유행어가 되었다.

가령 ‘극장식당…’ 어쩌고 하는 술집에서 진탕 마신 일행이 성우 김현직을 무대로 내세워서 “땅 덩어리 변함없되 허리는 동강나고…”라는 구절을 한 번 읊고 나면 사방에서 “삿갓어른 파이팅!” 따위의 환호가 터져 나왔던 것이다.

정보기관에서는 혹시 그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길까봐 비상 연락망까지 구축해놓고 조바심을 하고 있었는데, 정작 본인은 내가 김삿갓입네, 하고 내놓고 ‘싸다녔던’ 것이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전 국민이 ‘반공전선’으로 동원돼 있던 시절의 일화다.

그런데 그 동안 이처럼 ‘반북 이데올로기’에 세뇌돼 있던 국민들은 1972년 7월 4일, 방송을 통해 흘러나오는 뉴스에 귀를 의심했다.

…긴급 뉴스입니다. 남북한 당국은 오늘 서울과 평양에서 조국통일과 관련한 공동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이 성명은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북한의 김영주 조선노동당 조직지도부장이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발표했는데 그 내용을 보면 첫째, 통일은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둘째, 통일은 서로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행사에 의존하지 않고…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된 것이다. 분단 이후 최초로 남북한 당국이 합의해서 발표한 성명이었다. 무엇보다 공동성명 안에 ‘상대방에 대한 중상과 비방을 금지한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기 때문에, <김삿갓 북한 방랑기>도 뭔가 변화를 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긴급 대책회의가 열렸다.

“우선, <김삿갓 방랑기>라는 프로그램은 존속을 시킨다는 것을 전제하고, 무엇을 어떻게 바꿔야 하겠는지를 논의해 보자구.”

“무엇보다 시그널 나갈 때 하는 그 시낭송 있잖습니까. 어찌타 북녘 땅은 핏빛으로 물들었나, 그 부분은 빼야 하지 않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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