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원의 농사일기 48] 봄비 오는 날

  • 입력 2018.04.21 00:31
  • 수정 2018.05.08 11:29
  • 기자명 윤석원 중앙대 명예교수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금년 들어 정초부터 3월까지 이곳 영동지방에는 눈과 비가 거의 오지 않아 건조주의보가 하루가 멀다 하고 발동 되더니 드디어 지난달에는 고성에서 큰 산불이 나고 말았다. 다행히 4월 들어서는 꽤 많은 비가 내려 봄 가뭄 해갈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지난주 토요일엔 하루 종일 봄비가 단비가 되어 알프스 오토메(미니사과)를 촉촉이 적셨다.

사실 지난주에는 농사 일이 조금 많았다. 알프스 오토메 중 상태가 나쁘거나 벌레가 먹은 10여 그루의 나무는 지난 가을에 루비에스 묘목으로 대체하여 재식하였는데 지난 겨울의 혹독한 추위와 건조 현상으로 모두 말라 죽었다. 이 묘목들을 모두 캐내고 지난주에 새 묘목을 구입하여 다시 심었고, 집에서 먹을 요량으로 복숭아, 배, 노란사과, 속이 빨간 사과, 매실, 체리, 감 등 10여 가지 과수 묘목을 농장 곳곳에 심기도 했다. 100여 평의 밭은 작은집을 옮기면서 대형 포크레인이 땅을 밟아 다져놨다. 그래서 곡괭이를 들고 거의 개간 수준으로 밭을 다시 만드는 작업도 했다.

그러다가 오늘 단비가 내리니 좋고, 일을 좀 쉴 수 있어서 좋고, 새로 마련한 작은집 농막에서 한가한 시간을 보내게 되어 좋다. 과수원에서는 비 오는 날엔 특별히 할 수 있는 일이 없기도 해서 농막에 앉아 창밖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다. 멀리 보이는 바다와 해변가의 작은 건물들, 그 위로 강선리의 농가지붕들, 전봇대와 소나무, 그리고 내가 키우는 알프스 오토메의 싱그러운 자태들이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아랫마을 강선리에서 200여 미터 위쪽의 야산으로 둘러싸인 곳에 작은 농토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과거에는 주민들이 이곳에서 옹기종기 모여 살았기 때문에 농토라고 해봐야 텃밭 수준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생활이 불편하여 아래쪽 평지로 내려가 마을을 이루며 살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내가 농사짓고 있는 이곳을 강선리 분들은 윗골이라고 부른다. 그러니 조상들이 살던 곳에 후손들은 모두 아랫동네로 내려가 살고 있는데 내가 농막을 들여 놓고 지내고 있는 셈이다.

윗골에는 지적도상에는 작은 농토들이 20~30여개로 나누어져 있는데 지금 농사를 짓고 있는 농지는 아마 10여개 필지에 불과하고 나머지 농지들은 농사를 짓지 않아 거의 산지화 되어 가고 있는 실정이다. 10여개 필지마저도 자기 소유의 필지에서 농사짓는 농민은 나를 포함하여 2~3명에 불과하고 나머지 7~8개 필지는 아랫동네 분들이 소일거리로 농사짓고 있는 정도이다. 농촌도, 소규모 농지도 점차 사라져 가고 있다.

그래서인지 봄비 오는 날 문득 이 아름답고 평화로운 아랫마을 강선리 정경이 얼마나 오래 갈까하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진다. 아랫마을에는 지난해에만 10층짜리 아파트가 다섯 동이 들어섰다. 마을의 약 3분의 1 정도를 아파트가 차지할 것 같다. 결국 강선리 마을도 옛 모습은 점차 사라지고 도시 흉내를 내는 곳으로 전락할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한다. 수백년을 거쳐 오면서 강선리 주민들은 윗골에서 아랫골로, 다시 아랫골은 아파트로 상징되는 도시로 변모해 가는 모습이다. 이러다가 결국 농촌이 사라지는 것은 아닌지, 사라져도 괜찮은 건지 괜히 우울해지는 봄비 오는 날이다.

저작권자 © 한국농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