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농경사회 사람들] 금산어른 큰아들 ①

  • 입력 2018.04.13 09:50
  • 수정 2018.04.13 09:51
  • 기자명 이중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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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의 큰형님이면서 또 다른 내 친구의 아버지이기도 했던 사람이 있었다. 홍웅흠 씨. 그는 가장 노릇을 하지 못하는 아버지의 육형제 장남으로 열여덟에 장가들어 여덟 남매와 함께 어린 동생 셋까지 책임져야했던 농사꾼이었다. 젊은 시어머니와 어린 며느리가 동시에 또는 번갈아가며 출산을 거듭하던 시대였다.

홍웅흠 씨 아버지 금산어른은 젊은 시절에 머슴을 두 명이나 둘 정도의 부잣집 도련님으로 술과 여자와 노름판까지 기웃거리느라 농사일은 아예 할 줄 몰랐다. 1938년에 큰아들을 얻었는데 ‘국민징용령’이 내려졌다. 그는 징용을 피하기 위해 면소나 주재소에서 통지서를 가지고 올 때마다 땅문서 하나씩 쥐어주느라 재산을 몽땅 날려버렸다. 살길이 막막해지자 부산으로 달아나 영도 어느 조선소에서 일하다가 밀항선을 탔다. 히로시마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산 너머 공장에서 7년여 돈을 벌면서 도련님 근성은 완전히 벗어던졌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 한줄기 세찬 바람이 몸을 휘감아 허공으로 던져 올렸다가 내동댕이쳤다. 정신을 차려보니 사람들이 몸을 마구 짓밟으면서 달려가고 있었다. 그는 나중에야 원자폭탄이 터진 것을 알았고 뒤늦게 귀국선을 탔는데, 다리 불구자가 돼 있었다. 젊은 아내와 여덟 살 아들이 있는 집으로 돌아온 해방정국은 고통이었다. 일본에서 가져온 지폐는 쓸모가 없었다. 간신히 견디다가 전쟁 전에 도망치듯 산 너머 마을로 이사를 갔다.

그 마을에는 내 아버지가 살고 있었다. 내 아버지도 징용을 피해 만주를 떠돌다 일본으로 가서 생선장수 노릇으로 지낸 이력이 있었으니 두 사람은 죽이 맞았다. 죽이 맞는다고 해봐야 대나무장대 하나 달랑 들고 가는 낚시질이었고, 낮술이었고, 비틀걸음으로 돌아오며 질러대는 고래고함뿐이었고, 가끔 바지춤 풀어 오줌줄기를 멀리 쏘아 보내는 내기가 고작이었다. 술이 취하면 아내에게만 폭군으로 돌변했다가 아침이면 말없이 부지런한 농사꾼으로 돌아왔던 내 아버지와 달리 금산어른은 가계의 모든 책임을 이미 오래 전에 큰아들 어깨에 몽땅 지워버린 젊은 날의 부잣집 도련님 근성에 절어 있었다. 부지런한 낚시질로 며느리에게 반찬거리 걱정을 덜어주는 게 가족구성원으로서의 유일한 도움이었다.

금산어른 큰아들 홍웅흠 씨를 동네사람들은 ‘인민군’이라고 불렀다. 그는 지칠 줄 모르는 불도저 같은 사람이었다. 먼동이 트기 전부터 밤늦게까지 하염없이 일만 했다. 그야말로 바늘 하나 꽂을 땅이 없는 신세였는데, 간난장이를 거느린 어머니 금산댁은 며느리를 보고도 아들 둘을 더 낳았으니 비빌 언덕이 없는 그로서야 어디 쉴 틈이 있었겠는가. 평생을 동네 주막에 나가 술 한 잔 마신 적이 없었다. 술은 마시되 들판에서 일하는 틈틈이 마셨다. 부모님 앞에서는 언제나 깎은 밤처럼 반듯했다. 늘 서글서글하게 웃는 표정이었다.

그는 봄이면 ‘개등들이’(개의 등) 같은 땅에도 씨앗을 뿌렸고 겨울이면 괭이 한 자루로 면유림을 개간해 뽕나무를 심어 누에를 쳤다. 겨울철 한 방의 절반 이상은 나무로 엮어 만든 뒤주가 차지했고 그 안에는 어른 키 높이로 쌓아놓은 고구마가 어마어마했다. 그 고구마는 식구가 열 명도 더 되는 집안의 겨울을 지탱해 줄 유용한 양식이었다. 무엇보다 그 집에는 겨우내 백출 향내가 끊이지 않고 풍겼다. 날마다 산으로 들어가 삽주 뿌리를 캐오면 고부끼리 그걸 씻어서 썰어 말리는 일로 겨울해가 짧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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