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 입력 2018.04.06 09:48
  • 수정 2018.04.07 16:02
  • 기자명 김정열(경북 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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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지역 주민들이 토지, 물, 종자 및 기타 자연자원에 접근하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며…대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지탱하며 지속할 수 있는 농업생산 방식을 실천하고 촉진하는 농민과 농촌지역민의 노력을 지원해야함을 확신하며….”

김정열(경북 상주)

난데없이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몇 년 전 비아캄페시나에서 UN에서 『농촌과 농촌지역민 권리에 관한 선언』을 채택하기 위한 활동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참 뜬금없는 이야기라고 생각됐다.

현재 당장 내 발등에 떨어진 불이 얼마나 뜨거운데 UN이라니 거기가 어디요? 농민인 나는 당장 올해 농사로 먹고 살 수 있을지 없을지 막막한데 UN이라니 거기 뭐 하는데요?

대한민국에서는 경찰이 “쌀값 보장하라”는 생존권 요구를 하는 농민을 죽이고도 도리어 농민에게 그 죄를 뒤집어씌우는 세상인데 UN선언문이라니 그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싶었다.

최근 농민들은 ‘헌법에 농업의 공익적 가치를 명시하자’는 운동을 전개했다. 헌법을 바꾸는 문제가 당장의 내 삶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농민들에게 충분히 설명해 내지는 못 했지만 법과 개인의 삶, 법이 개인의 삶에 미치는 영향 등에 대해서 우리에게 고민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됐다. 그러면 그동안 ‘그 법’은 어디에 있었을까?

여성농민들의 삶에 법은 없었다.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로우며 누구에게나 동등한 존엄성과 권리가 있다”라는 말은 여성농민에게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말이었다.

결혼하기 전에는 부모 말이 법이고, 결혼하면 남편 말이 법인 줄 알고 산 여성농민의 삶에 UN이라는 국제기구에서 농민과 농촌지역민, 농촌여성들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선언문을 만든다는 이야기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로 밖에 들리지 않을 것이다.

선언문은 농촌 여성들의 차별적 상황을 전문에 적시하고 제4조 「여성농민과 농촌여성 지역민들의 권리」에서는 모든 인권과 근본적 권리를 차별 없이 누릴 수 있도록 명시하고 있다.

1948년에 만들어진 세계인권선언, 1967년에 채택된 여성에 관한 차별철폐선언은 이후 국제조약으로 구속력이 강화되고 각 국가의 헌법과 법률로써 구체화된다. 그리하여 개인들의 자유와 권리를 신장시키는 인류 진보의 역사를 이뤄왔다.

신자유주의의 강화와 자본의 독점으로 농민과 농촌 사람들의 삶의 기반조차 붕괴시키고 있음을 국제사회 또한 인식할 수밖에 없는 심각한 여러 사회적 현상들이 나타났다. 이에 UN 또한 농민의 권리를 국제적으로 인정하고 보장, 보호할 필요성을 공감하고 2012년부터 비아캄페시나를 비롯한 NGO들과 협의를 해 나가게 됐다.

2013년부터 선언문을 만들기 위한 4차례의 협의를 진행했는데 현재 47개국 인권이사회 국가들 중 34개국의 압도적 찬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영국 2개국의 반대로 어려움에 처해 있다. 한국정부 역시 적극 지지하지 못하고 기권이라는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사람이 우선인 헌법으로 개정하겠다는 문재인정부가 박근혜정부와 다르지 않는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이 선언문에 대한 정부의 입장을 정하기까지 단 한 차례도 농민의 입장을 수렴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정부의 입장을 결정하는 것은 참으로 비민주적·반농민적인 태도이다.

촉촉이 내리는 빗속에 벚꽃이 날린다. 18년 전인 2000년도부터 아시아의 가난한 농민운동가들이 이 선언문을 만들기 위해 제네바를 드나들었다. 어렵고 힘든 길 18년이 지난 지금 이제 벚꽃처럼 흐드러졌으면 좋겠다. 이달 9일부터 제네바에서 다시 이 선언문을 둘러싼 5차 협의가 이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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