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김삿갓 방랑기② 두만강 푸른 물에…

  • 입력 2018.04.06 09:46
  • 수정 2018.04.06 09:48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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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5분 드라마 김삿갓 방랑기>라는 프로그램의 탄생배경을 취재했던 때는 2002년 3월이었다. 그 자신이 <김삿갓 방랑기>의 연출경험이 있을 뿐 아니라 라디오 드라마로 잔뼈가 굵은 조원석 KBS라디오 편성 주간(당시)이 들려준 바에 따르면, 이 프로그램은 1964년 봄 개편 때 신설되어서 처음 전파를 탔다.

이상락 소설가

그때는 바야흐로 라디오 드라마가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이었다. 그해 4월, 라디오 피디였던 이상만이 색다른 기획안을 들고 올라가서 간부와 나눴다는 얘기는 이러하다.

“북한 얘기를 5분짜리 반공 드라마로 만들어 보자는 얘긴데, 드라마로 반공을 얘기한다…?”

“국장님, 우리 국민들이 북한의 실정을 너무 모릅니다. 아니, 아예 알려진 것이 없다고 봐야 합니다. 아이들 반공 포스터 그린 것 보시면 알 수 있잖습니까. 북한 사람들은 전부 시뻘건 얼굴에다 머리에 도깨비 뿔이 달린 줄 알고 있는 실정이니….”

“그래서 국민계몽 차원에서 요즘의 북한 돌아가는 실정을 짤막한 ‘뉴스 드라마’ 형식으로 청취자들에게 들려주자 이 말이지? 그런데… 타이틀이 이게 뭐야? 김삿갓 북한 방랑기?”

“주인공이 북한의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북한사회의 잘못된 부분을 눈으로 보고 풍자해야 하는데, 우리가 실제로 갈 수는 없잖습니까. 그렇다고 투명인간이나 손오공을 내세울 수는 없는 문제고…. 방랑시인 김삿갓이 제격 아니겠습니까?”

“좋아. 해보지 뭐. 그럼 주제가는 이미 정해졌네? 명국환이 부른 ‘죽장에 삿갓 쓰고 방랑 삼천리…’ 그 노래 유명하잖아. 이왕이면 국민들이 듣고 웃을 수 있게 코믹터치로 가자구.”

이렇게 해서 <5분 드라마 김삿갓 북한 방랑기>의 기획안이 일단 통과되었다. 하지만 이상만 피디가 첫 집필자인 김광섭 작가와 의논하는 과정에서 프로그램의 성격이 코믹터치가 아닌 정극(正劇) 형식으로 바뀌었고, 시그널 역시 명국환의 ‘방랑시인 김삿갓’이 아닌 김정구의 ‘눈물 젖은 두만강’으로 낙착되었다.

물론 당시에도 나이 든 사람들은 1936년에 발표된 ‘눈물 젖은 두만강’을 즐겨 부르기는 했으나, 그 노래를 이른바 ‘국민가요’로 만들어 준 것은 바로 김삿갓 방랑기였다. 뒷날 김정구가 문화훈장을 받았을 때, 사람들은 김삿갓 방랑기의 초기 연출자였던 이상만 덕분이라고 얘기하기도 했다.

프로그램 들머리에서 낭송된 ‘땅 덩어리 변함없되 허리는 동강나고 / 하늘빛은 푸르러도 오고 가지 못하누나 / 이 몸 죽어 백년인데 풍류 인심 간 곳 없이…’라는 시는 작가 김광섭의 작품이었다.

김삿갓으로 통하는 조선시대의 풍자시인 김병연이 평생을 떠돌다가 세상을 떠난 때가 1863년이었고, <김삿갓 방랑기>가 첫 전파를 탔던 때가 1964년이었기 때문에 ‘이 몸 죽어 백 년인데…’라는 말은 산술적으로도 맞아 떨어지는 표현이었다. 어쨌든 죽었던 김삿갓은 백 년 만에 다시 살아나서, 죽장 짚고 삿갓 쓰고 북한 땅 방랑에 오르게 된 것이다.

<김삿갓…>은 성공적이었다. 북한 소식에 깜깜했던 상황에서 사람들은 매일 낮 12시 55분에 KBS 라디오를 통해 울려퍼지는 그 5분 드라마를 통해 (그 내용이 사실이든 의도적으로 가공된 것이든) 북한 소식에 대한 갈증을 조금이나마 해소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조원석 당시 편성주간이 들려준 다음 얘기는 매우 흥미롭다.

“무엇보다 대북 심리전 차원에서 <김삿갓 방랑기>는 효과 만점이었지요. 그러다 보니 북한 측도 가만있을 수 없었겠지요. <김삿갓…>이 전파를 탄 지 2년이 지난 1966년도에 북한에서도 대응 프로그램을 만들었는데, 그 프로 이름이 <홍길동 남조선 방랑기>였어요. 하지만 실패했지요. 당시 남한은, 물론 군부독재 치하이긴 했어도, 북한에 비해 덜 폐쇄적이었잖아요. 그러니까 풍자할 거리를 찾기가 상대적으로 쉽지 않았던 것입니다.”

결국 <홍길동 남조선 방랑기>는 남한의 이 곳 저 곳을 애매하게 방랑하다가 그만 폐지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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