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김삿갓 방랑기① 아세요? 김삿갓 북한 방랑기!

  • 입력 2018.03.30 09:08
  • 수정 2018.03.30 09:10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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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가 집 뒤 켠 텃밭에서 밭갈이를 한다, 아내가 밭머리에 나와서 소리친다.

“춘식이 아부지, 쟁기질 그만하고 얼른 집에 와서 점심 잡숴요!”

“벌써 점심때가 된 것이여? 김삿갓 방송도 아직 안 했는디?”

“오늘 이장이 동네 스피커를 잠가놓고 면사무소에 가는 바람에 김삿갓 방송 안 나온대요!”

이상락 소설가

‘김삿갓 방송’이라니? 사오십 대 이상의 나이든 축이 아니라면 뭔 소린가, 할 것이다.

비슷한 시각, 전방부대 연병장의 구령대 뒤쪽 스피커에서 익숙한 ‘눈물 젖은 두만강’ 가락이 흘러나오더니, 역시 귀에 익은 성우의 목소리가 병영을 쩌렁쩌렁 울린다.

남자성우 : 땅 덩어리 변함없되 허리는 동강나고 / 하늘빛은 푸르러도 오고가지 못 하누나 / 이 몸 죽어 백 년인데 풍류인심 간 곳 없이 / 어찌타 북녘 땅은…

여자성우 : 5분 드라마 김삿갓 북한 방랑기 천삼백스물두 번째 ‘묘향산의 메아리’, 김광섭 극본 이상만 연출…

때 맞춰서 ‘교관’ 완장을 찬 소대장이 내무반을 향해 소리친다.

“야, 김 병장! 김삿갓 방랑기 안 들리나! 오후 일과 곧 시작할 텐데, 소대원들 사격술 훈련 집합 안 시키고 여태 뭣하고 있어!”

그랬다. 매일 낮 12시 55분에 시작했던 <김삿갓 북한 방랑기>(나중엔 <김삿갓 방랑기>로 바뀜)는 농촌에서는 점심시간을, 군대에서는 오후 일과의 시작을 알리는 시보의 구실을 했다.

앞에서는, 드라마 들머리에 시그널 음악을 배경으로 흘러나오는 성우의 시구(詩句) 중, 끝부분을 차마 생략했는데, 사실은 ‘…어찌타 북녘 땅은 핏빛으로 물들었나’, 이렇게 돼 있었다. 북녘을 ‘피로 물든 땅’이라 표현한 것이다. 어차피 남과 북이 서로의 체제나 정권을 향해 온갖 비방전을 전개하던 시절에 탄생한 ‘반공 드라마’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김삿갓 방랑기>라는 프로그램은 어떻게 탄생했을까? 김삿갓은 조선후기의 방랑시인인 김병연의 별호인데 왜 하필 김삿갓으로 하여금 북녘 땅 여기저기를 방랑하게 했을까? 북한에 대한 정보가 지극히 빈약하던 시기에, 매일 5분짜리 라디오 드라마에 담았던 그 이야깃거리는 또 어떻게 구했을까?

반공 드라마이자 국책(?) 프로그램으로 구실을 해온 이 <김삿갓 방랑기>의 탄생 배경과 그 내력을 객관적으로 탐색하는 일 또한 권위주의 정권 시절엔 감히 엄두를 낼 수 없었다. 내가 초창기부터 이 프로그램에 간여해온 방송 관계자들을 만나 취재를 하고, 그 내용을 다큐멘터리로 방송을 했던 때는 2002년 3월이었다.

이태 전인 2000년 6월에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이 평양에서 열렸고, 이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 종사하는 인사들이 한때나마 간단없이 북녘 땅을 드나드는 세상이 되었으니 적어도 제한적이나마 ‘하늘빛은 푸르러도 오고 가지 못 하’는 때는 아니었다.

<김삿갓 방랑기>는 1964년에 처음 라디오 전파를 탔다가 2001년 4월에 그야말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1988년 1월에 8,000회 방송을 기록했고, 1994년 2월에는 방송 드라마 사상 그 비교 대상을 찾아볼 수 없는 1만 회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중간에 프로그램의 구성이 일부 바뀌면서 새롭게 횟수를 매겼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몇 회를 방송했는지는 계산이 쉽지 않다.

어쨌든 <5분 드라마 김삿갓 방랑기>는 우리가 일제의 강압통치를 받았던 기간보다 더 긴, 만36년 동안 국민들에게 ‘반공의식’을 주입했다. 프로그램의 수명이 그처럼 장구했던 만큼, 일반 청취자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사연들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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