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류농지세에서 한-미 FTA까지 투쟁의 산증인

이 사람 ㅣ 충북 충주 농민운동가 박승호씨

  • 입력 2018.03.23 10:00
  • 수정 2018.03.23 10:28
  • 기자명 심증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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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지역의 고추 투쟁, 농협민주화 투쟁, 충주농민회 결성, 한-미 FTA 저지 충북대책위 활동 등에 묵묵히 앞장섰던 박승호 대표가 지난 19일 하우스에서 자라고 있는 고추 모종을 살피며 밝게 웃고 있다.

[한국농정신문 심증식 편집국장]

2006년 11월 22일 한-미 FTA 반대를 위한 전국동시다발 집회가 있었다. 정부는 2006년 2월 한-미 FTA 협상을 공식 발표했다. 이후 본격적인 협상이 한·미 양국을 오가며 진행됐다. 진보정권 또는 일각에서 반미정권이라는 비아냥거림을 듣기도 했던 노무현정부의 한-미 FTA 추진은 농민과 노동자에게 큰 배신감을 안겨주는 사건이었다. 

특히 한-미 FTA는 농업에 괴멸적 타격을 줄 것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었기에 농민들이 우려하고 반발하는 것은 당연했다.

2006년 10월 한-미 FTA 4차 협상을 마치면서 농민들이 체감하는 위기감은 더욱 커져갔다. 전국적으로 한-미 FTA 저지를 위한 범국민대책위원회가 만들어지고 대책위원회 차원에서 2006년 11월 22일을 기해 광역단위 집회가 개최됐다.

이날 집회는 격렬했다. 각 지역에서는 도청진입을 시도하는 참가자들과 저지하는 경찰들이 격렬하게 충돌했고 흥분한 참가자들에 의해 도청의 시설물이 일부 훼손되기도 했다. 농민들이 있는 곳이라면 전국 어디든 목격되는 반발이었다. 청주도 마찬가지였다. 충북도청을 둘러싼 시위대가 경찰과 출동하면서 그날 도청 울타리가 부서졌다.

“실내체육관에서 집회를 하고 도청까지 상여를 앞세우고 행진을 하고 가서 도지사 면담을 요청하려고 했지. 그런데 경찰이 도청을 포위해서 들어갈 수 없게 한 거지. 농민들이 화가 나니까 상여에 불을 지르고, 도청 울타리를 뜯어내고 그랬어. 그 당시 도지사가 지금 자유한국당 국회의원인 정우택이었어. 이 자가 아주 나쁜 놈이야. 농민들이 그렇게 찾아 갔으면 농민들을 만나 봐야 하는 거 아냐. 그런데 끝날 때까지 코빼기도 안보였어. 그러니 농민들이 더 화가 난거야.”

이날 청주 집회를 주도한 한-미 FTA 저지 충북대책위원회 박승호 공동대표의 말이다. 오늘 기자는 충북 충주에서 박승호 대표를 만났다. 박 대표는 2006년 당시 전국농민회총연맹 충북도연맹 의장으로, 한-미 FTA 저지 충북대책위 공동대표를 맡고 있었고 11월 22일 대회를 주도했다. 집회 후 경찰은 기물파손 혐의로 박 대표를 포함해 대책위 간부 3명에 대해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도청 울타리가 파손됐다고 1,200만원의 손해배상을 하라는 거야. 좀 있으니 체포영장이 떨어졌지. 그래서 청주에 있는 성당에 천막을 치고 농성을 했어. 성당 신부님이 전에 가톨릭농민회 주임신부도 하셨던 분이라 정말 많이 도와 주셨지. 한 달 정도 농성을 하고는 자진출두를 했어.” 박씨는 한 달간 구치소 생활을 하다가 보석으로 출소했다.

한-미 FTA 저지 투쟁으로 수감되기도

우리 농업에서 전환기적 사건을 꼽으라 한다면 한-미 FTA를 빼 놓을 수 없다. 한-미 FTA가 발효되고 5년이 지난 현재, 우리 농업은 당시에 걱정했던 것 이상으로 무너져 내렸다. 농업붕괴라는 역사적 사건 앞에 몸을 던져 싸웠던 농민 박승호 대표의 삶의 이력은 농민운동의 역사와 맥을 같이 한다.

허나 그는 농민운동 내에서도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지 않았다. 평생 농사를 지으면서 묵묵히 조용히 농민운동의 역사를 써내려간 한 농민운동가의 이야기를 기록하고자 충북 충주를 찾았다.

일본 제국주의의 수탈이 극심했던 일제 말기 엎친 데 덮친다고 수년간 가뭄이 계속되면서 농민들의 삶은 나날이 피폐해져 갔다. 경북 문경에서 소작농으로 근근이 살아가던 박씨의 조부께서는 더 나은 삶의 터전을 찾아 이삿짐을 쌌다.

“할아버지께서 먹고 살기 힘드니까 다른 지역으로 이주할 것을 고민하셨고, 몇 년씩 가뭄이 들어 더 이상 미련을 두지 않고 충주 대소원으로 오게 됐지. 그때가 살기가 어려워 만주에 가고 그러던 시절이잖아. 나는 대소원에서 태어났지. 충주에 와서도 할아버지는 소작농으로 살았어. 집안이 어려워서 공부도 제대로 할 수 없었는데 초등학교 3학년 때 6·25전쟁이 터져서 학교를 그만 뒀어.”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어렵게 살아가고 있었지만 유년기 박승호는 공부에 대한 욕망이 컸다. “전쟁이 끝나고도 바로 학교에 가지 못했지 뭐. 공부보다 일하는 게 중요했으니까. 그때 강원도에서 피난 오신 훈장님이 있었는데, 그분이 사랑방에 거처하게 되면서 그분한테 2년간 한문을 배웠어. 천자문, 동몽선습, 명심보감, 소학 이런 거 외우고 그랬지. 그러다 늦게 학교에 다시 들어가서 17살에 졸업을 했어.” 17살의 초등학교 졸업, 그 당시에는 흔한 일이었다고 한다.

박씨는 초등학교를 졸업 후 사범학교에 진학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공부보다는 농사일을 하라고 했다. 당장 일을 해서 가계를 돕는 게 급했던 시절이었다.

“사범학교를 나오면 교사가 될 수 있었는데 형편상 학교는 갈 수 없고 해서 그 당시 통신강의록이라는 것이 있어서 그걸 사다 놓고 2년간 독학을 하다가 아버지의 반대로 결국 포기하고 말았지.” 공부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그 길로 아버지를 도와 본격적인 농사를 시작했다. 충주에서 할 수 있는 건 담배농사와 논농사였다.

“청년 시절이니까 농사짓는데 힘든 건 모르겠는데 희망이 없는 거야. 그러던 중에 이웃에 사는 김상덕씨라는 분을 통해서 많은 것을 배우고 농민운동을 알게 됐지.”

김상덕씨는 충주 출신의 가톨릭농민회 초창기 활동가로 1980년대 후반 가톨릭농민회 청주교구 회장과 1990년대 초 가톨릭농민회 전국회장을 역임한 농민운동가다.

“김상덕씨가 크리스찬아카데미 교육을 가라고 해서 가게 됐지. 거기서 강원룡 목사 같은 분들의 강의를 들으면서 세상에 대해 눈을 뜨게 됐어.”

크리스찬아카데미는 1960년대 중반 강원룡 목사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조직으로 당시 사회문제 등을 교육하며 활동가들을 양성하는 역할을 했다. 1960~1970년대 초기 농민운동가들은 대부분 크리스찬아카데미 출신이다. 그 역시 크리스찬아카데미 교육을 받고 농민운동에 발을 딛게 됐다.

“전국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크리스찬아카데미 교육을 받았는데 그 당시에는 조직이 돼 있는 것이 아니었어. 당시에 크리스찬아카데미에서 간사로 일했던 박진도, 이우재, 한명숙, 신영일, 방용석 등이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가톨릭농민회로 편입해라’, ‘뭉쳐야 투쟁할 수 있는 길이 생긴다’며 지역별로 모이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지. 그렇게 해서 가농이 만들어진 거야. 충북에서도 1977년 유사혁, 김상덕, 조희부, 나 그 외 여러 사람들이 모여서 가톨릭농민회 청주교구를 만들었어.”

크리스찬아카데미 교육서 농민운동에 눈 떠

묵묵히 농민운동에 나섰던 본인의 삶의 이력을 떠올리고 있는 박승호 대표.

유신의 광풍이 몰아치는 엄혹한 유신 말기 그는 가톨릭농민회를 통해서 조직적인 농민운동에 참여하며 본격적인 농민운동가의 길을 걷게 된다.

“기억에 남는 투쟁이 함평고구마 투쟁, 오원춘 사건, 수세폐지 투쟁 등이지. 전국에 투쟁이 있으면 쫓아다니며 힘을 보탰지. 특히 충북에서는 을류농지세 폐지투쟁을 격하게 했어. 그때 내가 을류농지세 폐지에 대한 질의서를 만들어 군청에 보내기도 했거든.”

이뿐 아니다. 고추 투쟁이나 농협민주화 투쟁 등 1970~80년대의 엄혹한 시절에 그의 활동은 쉴 새가 없었다. 이미 지역에서는 요주의 인물이 됐고, 경찰의 감시와 미행이 일상이었다.

“전두환정권 시절 농협조합장 직선제 서명운동 하러 다니다 처갓집 동네까지 갔어. 저녁때가 돼 처갓집에 들어가 저녁을 먹고 있는데 담당 형사가 찾아 왔더라고. 거기까지 미행을 한 거지. 집에서 나와 버스 타러 나가면 어떻게 알았는지 형사가 기다리는 일은 다반사고. 나중에 알고 보니까 버스 정류장 근처 이발소가 프락치였던 거야.”

감시, 미행 등의 위협이 항상 뒤따랐지만 활동을 멈출 수 없었다. 1990년대에 들어오면서 충주에 자생적 농민회가 만들어졌다. “전농이 만들어지기 전에 충주에서는 먼저 자생적 농민회가 활동했지. 지금 성주에 가 있는 전여농 전 회장인 윤금순이 젊은 시절 충주에서 활동을 했는데 윤금순이 고생 참 많이 했어. 윤금순 하고, 오태수라고 초대 충주농민회장을 한 분들하고 같이 농민회를 만들었지.”

충주농민회의 결성은 1980년대 말 의료보험 투쟁, 농협민주화 투쟁, 고추 투쟁이 전개되면서 계기가 마련됐다. 특히 고추 주산지인 충주지역에서 벌어진 고추 투쟁은 당시로서는 대중적 투쟁의 기록을 남겼다.

“윤금순, 오태수가 주도해서 고추 투쟁을 하기로 하고 밤 12시에 목계휴게소에 고추를 가지고 집결했어. 트럭 30대에 고추를 싣고 농협중앙회 가서 중앙회 건물을 고추포대로 빙 둘러 포위하고. 청송농민회도 오고, 전라도에서도 와서 같이 농성을 했지. 지금 신관 자리에 체육관이 있었는데 거기서 자고, 마당에 솥 걸어 놓고 밥 해 먹어가며 10일간 농성을 하니 정부에서 7,000톤인가 수매를 하기로 해서 내려왔지.”

고추 투쟁을 계기로 충주농민회가 만들어졌다. 이후 1994년 전국농민회총연맹이 건설되면서 농민운동은 가톨릭농민회, 기독교농민회와 같은 종교적 외피를 벗고 대중과 함께 대중운동으로 발전하게 됐다. 박씨 역시 충주농민회 결성 이후 충주농민회를 통해 농민운동을 이어왔다. 3·4대 회장을 맡았으며, 2005년 전농 충북도연맹 의장을 지냈고, 충북도연맹 의장 시절인 2006년 한-미 FTA 투쟁으로 수감되는 일도 겪었다.

평생을 농민운동을 하며 살아오면서도 그는 농사로 삶의 기반을 다져왔다.

“담배농사를 지었는데 그게 괜찮았어. 담배 수매하면 목돈 생겨서 땅도 조금씩 사게 되고. 소 팔아서 한두 마지기 장만하고 그렇게 농토를 마련했지. 그런데 이제 힘들어서 농사 못 짓겠어. 4,000평 임대주고, 1,000평이나 될까. 먹을 만큼만 농사짓고 있지.”

평생 농민운동과 농사로 살아온 그는 이제 75세의 노인이 됐다. 더 이상 농사를 이어가기에는 힘에 부치지만 그래도 농사를 놓을 수 없다. 자녀들이 읍내로 나와 편히 지내라 해도 흙을 만지면 살아야 한다며 이곳을 지키고 있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인데. 고령화 되고, 그나마 젊은 사람들은 안 나서고…. 요즘 헌법 얘기 나오는데 헌법에 농산물 생산비 보장이 꼭 들어가야 해. 공산품들은 다 자기들이 가격을 결정하는데 농민들만 가격 결정을 못하잖아. 소비자도 중요하지만 농민들이 살 수 있게 해줘야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거잖아.”

그는 착잡한 농촌현실에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곧 봄소식이 들리겠지만 아직은 휑한 들판에 차가운 빗방울이 떨어진다. 집 옆 작은 하우스엔 아들네 밭에 심을 고추모종이 자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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