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칼럼] 알아차림

  • 입력 2018.03.18 12:05
  • 수정 2018.03.18 12:07
  • 기자명 최용혁(충남 서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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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혁(충남 서천)

예를 들면, 건강·가족·공기·사랑과 우정 같은 것. 소중함을 알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은 몽땅 잃는 것이다. 다 잃고 나서야 비로소 무게를 알 수 있다. 마치 무슨 깨달음처럼 이야기들 하지만, 학습 방법 치고는 참 바보 같은 방법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 대부분이 그렇게 배운다는 점에서 불현듯 인류에 대한 애정이라든지, 부자에 대한 연민 또는 정의와 평등이 우리 삶에 아주 가까이 다가온 듯한 뿌듯한 감정에 마음이 편안해진다. 웬만하면 다들 바보니까.

아무리 작은 일이더라도 반드시 원인이 있기 마련이다. 한여름에 감기에 걸리거나 시험에서 빵점을 맞더라도 이유가 있다. 내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을 수도 있는 커다란 손실 또는 상실의 사건이라면 절대 그냥, 갑자기 올 리가 없다. 모든 것을 잃기 한참 전부터 수많은 징조, 조짐을 동반하기 마련인데, 다만 우리가 전혀 알아차리지 못 할 뿐이다. 그렇다고 이러한 징조나 조짐이 특별한 계시거나 신비한 체험이거나 아주 주관적인 느낌은 아니다. 운동선수가 시합에서 승리하기 전에 반드시 입어야 하는 속옷 색깔이나 깎지 않는 수염, 또는 아침밥 먹자마자 재수없게 깨뜨린 그릇이나 자동차 앞 유리에 떨어진 새똥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특별한 사람이 특별하게 느끼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좀 더 이유가 타당한 것. 과학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 차라리 봄 다음에 여름, 여름 다음에 가을, 가을 다음에 겨울, 겨울 다음에 다시 봄 같은 것. 콩 심으면 콩 나고 팥 심으면 팥 나는 것, 원인과 결과의 범주 안에서 모든 사건은 해석된다.

낮이 지나면 밤이 오는 것 같은 일이므로 조금만 노력하면 어느 정도는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지금 당장 시험해 보자. 그저 잠시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바쁘게 살았을 것이다. 물론 먹고 살기 위해 그랬을 테고. 매 순간 순간을 떠올리며 죽을 짓을 했는지, 살 짓을 했는지, 반드시 필요한 일을 했는지, 남들이 다 하니까 하는 일이었는지. 오늘 하루 삶의 방향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었는지, 퇴보하는 것이었는지, 내가 한 일을 내가 모를 수가 없다. 이마저 쉽게 알아차릴 수 없게 된 데에도 이유가 있다. 개인적인 차이가 아니라 사회구조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대중이 무언가를 알아차릴 수 없게 만드는 세력이 있어, “우리가 정해준 대로 살아야 돼!”하고 일상 모든 것에서 명령하는데, 우리는 “왜 그려?”라고 현실에서는 말하지 못하고, 그저 <매트릭스> 같은 영화 정도를 보며 무엇인가 어렴풋이 느끼다 마는 것이다. 알아야 할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가상현실을 사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불가의 수행법에 ‘알아차림’이라는 것이 있다. 몸과 마음의 매 순간에 집중하여 그 순간의 느낌을 알아차리려고 하는 것이 수행의 방법이다. 숨을 어떻게 쉬고 있는지, 지금 씹어먹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어떤 맛을 느끼는지, 조금 더 미세한 순간에 집중해 보는 것이다. 큰 깨달음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남의 손 따라 두다가 대마를 날리는 어리석음 정도는 막을 수 있을 것 같다.

봄, 들판에 냉이나 쑥이 솟아나는 데도 이유가 있을 텐데, 한 번 생각해 보자. 그리고 우리 곁에 일어나는 수많은 징조들이 앞으로 벌어질 어떤 결실을 예비하고 있는 것인지 잠시 숨을 멈추고, 숨을 고르고, 잘, 들여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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