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농경사회 사람들] 연재에 앞서 객쩍은 소리 한마디

  • 입력 2018.03.16 11:59
  • 수정 2018.03.16 12:00
  • 기자명 이중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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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영천에는 3월 폭설로 인해 수많은 포도밭 시설물이 무너져 내린 일이 있었다. 내가 사는 마을만 해도 600평 단위로 조성된 포도밭 시설물이 물기 잔뜩 머금은 눈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폭삭 엎어진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고, 어떤 마을은 그 면적이 너무 넓어 거의 재난에 가까울 정도였다. 문제의 원인은 조류 피해 방지를 위해 포도밭 시설물 위에 덮어놓은 그물이었다. 엄청난 적설량이 촘촘한 그물망 위에 쌓인 상태에서 비가 내렸고, 그 위에 다시 눈이 쌓이면서 시설물이 무게를 감당하지 못했던 것이다.

지독한 한파 때문에 미뤄졌던 복숭아나무 가지치기 품앗이가 끝나지 않은 상태였으나 짬을 내 어느 포도밭 시설물 해체 작업을 딱 하루 거들었다. 어느 집에서는 아들과 사위들이 달려와 팔을 걷어붙였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은 많은 밭에는 시내 무슨 여성단체에서 달려와 거들었고, 또 어느 밭에는 동사무소가 나서서 공공근로자들을 투입시켰다고 한다. 고맙고 또 고마운 일이지만 그런 인력 지원도 받지 못하는 농가가 꽤 있는 모양이다. 건넛마을 여성 통장은 남편이 달포 전 병원에 입원하는 바람에 어떻게 손을 써볼 엄두가 나지 않아 수백만 원을 내건 뒤 복구해달라고 광고했다는 소리도 들린다.

십년도 더 전에 나는 <한국농정>에 두 해 남짓 ‘농사일기’를 연재한 적이 있었다. 그 후, 1946년 10월 항쟁을 다룬 몇 권의 시집을 준비하느라 농민회도 농정신문도 까마득 잊고 살았는데 지난 겨울 다시 연재 제안을 받은 뒤 <내가 만난 농경사회 사람들>이란 주제로 옛날 농사꾼 이야기를 한 번 해볼 생각이었다. 거기에 포함될 사람들은 어디에도 없을 것 같지만 또 어디에나 있을법한 그런 사람들이다. 주린 시대를 가열차게 살아낸 사람도 있겠지만 농사는 흉내만 내면서 정치판을 기웃거리거나 풍류를 좇다가 집안 식구들로부터 버림받은 사내들도 포함될 것이다.

그런데 애초 계획을 조금 바꿔야 할 일이 생겼다. 무너져 내린 포도밭 시설물을 해체한 뒤 다시 세우는 일을 거들어주고 돌아온 날 밤, 건넛마을 여성 통장이 했다는 광고가 귓바퀴에서 맴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르르 달려가 당장에 해치워 줄 젊은 사내들이 없는 마을, 그 사정을 뻔히 아는 처지인 마당에 우리라도 가서 거들어주자고 말하지 못한 건넛마을 사내들, 그 중에는 나도 끼여 있었다.

그 날 나는 기왕에 준비해놓았던 원고 앞에 허튼소리겠지만 한마디 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했고, 마감일을 넘겨 빗소리가 들리는 아침에 이렇게 객쩍은 소리를 늘어놓고 있는 꼴이 되고 말았다. 그걸 알았는지 허튼소리 그만 지껄이라고 빗소리가 제법 사나워진다.

지금 농사를 짓는 농민들 중에서 ‘농경사회’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늙으신 어머니가 지키는 고향집 낡은 장롱 밑바닥에는 배냇저고리가 간직되고 있고, 아름답고 정겨운 마을공동체가 살아 있어 유장한 삶의 물결이 흘러넘치던 시절을 기억하고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도시가 각박해졌다는 한탄은 이미 오래 전 일이 됐지만, 농촌이 각박해졌다는 소리는 우리 모두가 애써 참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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