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협궤열차⑤ 송충이는 힘이 세다

  • 입력 2018.03.16 11:22
  • 수정 2018.03.16 11:26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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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년의 협궤열차 기관사 박수광이 기관조사였던 시절로 되돌아가보자. 그 시절 그는 수인선 협궤열차만 탔던 것은 아니었다. 똑같은 협궤열차가 수원과 여주를 잇는 ‘수여선'에도 운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수인선과 수여선을 번갈아 운행 했던 것이다.

이상락 소설가

물론 수여선은 일제가 여주, 이천에서 생산된 쌀을 수탈해가기 위해서 개설한 철로였다. 수원을 출발하여 화성-원천-신갈-용인-양지-제일-오천-이천을 거쳐 여주에 이르는 노선이었다.

어느 여름날, 수원에서 여주로 가는 막차를 운행했던 기관사 일행은, 여주의 숙소에서 숙박을 한 다음, 새벽 첫 기차를 몰고 수원을 향해 출발했다. 수인선과는 달리 수여선은 철로가 산간지역으로 뻗어 있었다.

그런데, 잘 달리던 기차가 용인의 제일역(霽日驛) 근처 고갯길에 이르자 갑자기 헛 바퀴질을 하며 제 자리에서 맴돌았다. 기관사가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놈의 기차가 잠이 덜 깼나, 왜 헛바퀴가 도는 거지?”

“그러게 말입니다. 제가 내려서 살펴보겠습니다.” 기관조사 박수광이 아직 어둠이 덜 걷힌 철로로 내려섰다. 그런데 철로를 딛고 두어 걸음을 걷다가 그만 쪼르르, 미끄러져서는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어이쿠, 엉치뼈야. 어떤 놈이 레일에다 기름을 발라놨나….”

간신히 일어난 박수광은 참 요상한 일도 다 있다고 투덜거리며 아예 몸을 굽힌 채 설설 기면서 레일을 살펴 나아갔다. 드디어 원인을 파악한 박수광이 기관사에게 소리쳤다.

“송충이 때문이에요, 송충이!”

“송충이? 송충이가 뭐 어쨌다고?”

“야산에서 송충이 떼가 철길로 기어 내려와서…”

여기서, 그 날 기관조사로서 수인선 협궤열차에 탑승했던 박수광 씨의 얘기를 들어보자.

“그땐 송충이가 참 많았어. 그런데 날이 너무 더우니까 고놈들이 전부 야산에서 철길로 내려와서는 레일이 안 보일 만큼 덕지덕지 붙어 있었던 거야. 시원했겠지. 말하자면 기차 바퀴에 송충이들이 으깨지면서 바퀴가 헛돈 거라고. 그 나이 많은 기관사가 나한테 그러더라고. 세상에, 송충이가 기차를 막아 세웠단 말은 첨 들어본다고, 허허허.”

박수광씨는 수여선 협궤열차의 ‘송충이 사건’은 아무한테도 얘기 안 했다고, 특별히 나한테만 얘기해 주는 거라고 생색을 냈고, 난 기꺼이 막걸리를 대접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그 날 아침에 어떻게 했을까?

박수광이 겨울철에 눈을 치우기 위해 기차에 비치해 놓은 빗자루를 들고 내려와서 기관사에게 소리쳤다.

“제가 빗자루로 선로에 붙은 송충이 떼를 쓸면서 언덕길을 올라갈 테니까, 땅에 떨어진 놈들이 레일위로 다시 달라붙기 전에 천천히 기차를 몰고 뒤따라오세요! 비켜라, 이놈들아!”

박수광이 숨을 헐떡거리며 빗자루로 송충이 떼를 쓸어서 길을 개척 하고, 그의 꽁무니를 기차가 덜커덕거리며 따라가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우스꽝스럽다. 협궤열차 시절의 이 괴이한 삽화는 하마터면 영영 묻힐 뻔했다.

그 무렵 수여선에 투입된 협궤열차의 기관은 너무 낡아서 걸핏하면 고장이 났다. 특히 피스톤의 왕복운동을 회전운동으로 전환해주는 크랭크축의 쇠붙이 지지대가 부러지는 일이 잦아서 인근 야산에서 나뭇가지를 꺾어다 깎아 임시방편으로 끼워 쓰기도 했다.

결국 수여선 협궤열차는 1972년에 이용객이 적어 폐쇄되었고, 더불어 빗자루로 송충이를 쓸어낼 일 따위도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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