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신애, 그 미로를 헤매다

이중기의 농사이야기 - 33

  • 입력 2008.05.18 16:19
  • 기자명 이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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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꾼이 농사 이야기만 하면 되는데, 저는 오늘 좀 엉뚱한 얘기를 하고 싶습니다.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냐고 나무란대도 할 말은 없습니다. 지난 글에서 몇 번이나 한두 마디씩 언급을 했던 이야긴데요, 1930년대 작가 백신애를 말입니다.

제가 작가 백신애를 처음으로 만난 것은 아마도 고등학교 2학년 때쯤이었을 것입니다. 참 맹랑하게도 무작정 시인을 동경하여 체계도 없이, 철부지 염소처럼 마구잡이로 책을 먹어치우던 대략 난감의 시절, 우연히 만난 ‘문원각’ 판 전집에서 ‘꺼래이’, ‘적빈’, ‘복선이’, ‘악부자’ 등 10여 편이었습니다.

그때 받은 감동은 남달랐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그이가 ‘영천 출신’이라는 단지 그 이유 하나만으로 무작정 백신애를 편애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천둥벌거숭이 까까머리 고등학생은 문예부 후배들에게 백신애를 들먹이며 건방을 떨기 시작했습니다.

후배들에게 계속해서 건방을 떨기 위한 얘깃거리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더 많은 백신애 작품이 필요했습니다. 학교 공부는 뒷전으로 미루어 놓고 여기저기 기웃거려 보았으나 어디에서도 그 이상의 작품은 찾을 수 없었고, 시인이 되기 위해 치열(?)하게 살았던 20대에는 그만 백신애를 까마득 잊고 말았습니다.

그 후 문단 말석에 이름을 올릴 무렵이었던 1990년대 초, 경북 경산의 김윤식 시인이 30여 년 발품을 팔아 찾아낸 작품을 묶어 펴낸 조선일보 판 『꺼래이』(소설 17편 수록)를 보고 참으로 오랜만에 백신애를 다시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일제 강점기하에서 소설보다 더 극적인 삶을 살다 우리 나이 서른두 살로 요절한 백신애는 김윤식 시인이 아니었더라면 영원히 묻힐 뻔한 일이었지만, 그 분의 외롭고 지난한 고투 끝에 찾아낸 결과물을 보면서 더 많은 작품을 찾아낼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몇 년 지나지 않아 그만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다시 백신애를 잊어버렸습니다. 10년이 넘는 농민회 활동이 백신애 작품을 찾아내는 일에 매달리지 못하게 한 구차한 이유이면서 변명입니다.

저는 늘 부채의식에 시달렸습니다. 입만 열면 백신애를 중얼거렸지만 마음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겨우 2006년에야 조금씩 시간을 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막막했습니다. 저는 백신애를 찾아 미로를 헤매기 시작했습니다. 한국문학사가 외면 해버린 작가 백신애가 작품을 발표했던 1930년대 당시의 잡지를 찾아내는 일은 그야말로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가방 하나 달랑 둘러매고 전국의 도서관을 전전하였고 조금이라도 백신애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막무가내로 매달렸지만, 그러나 백신애는 밤길의 불빛처럼 다가갈수록 그만큼 더 멀어지는 것이었습니다.

2006년 가을, 저는 백신애 탄생 100주년을 눈앞에 두고 영천의 후배작가 백현국과 도모(?)하여 문학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고등학교 선배에게 저간의 사정을 설명하고 생떼(?)를 부리기 시작했습니다. ‘영천의 작가’라는 달랑 그 이유 하나만 들이대며 강짜를 부렸지요. 한국문학사에서 소외당한 작가 백신애의 작품을 찾아 세상에 알리고 재조명하는 일의 시급성을 설명하고 협조를 구한다는 것이 사뭇 협박(?)이었으니 지금 생각해도 천둥벌거숭이의 무모함에 얼굴이 붉어지고 등짝에서는 식은땀이 흐릅니다.

저는 그동안 백신애가 발표한 소설 22편과 수필, 기행문 등 33편이 실린 잡지 및 신문의 원본을 찾아내었는데, 새로 찾아낸 것은 소설 3편과 수필 17편입니다.

지난 겨울 그 일 때문에 무시로 전농 사무실을 들락거리며 귀찮게 하기도 했는데, 내일이면 그 일도 마무리를 하게 됩니다. 그 분의 작품 전체를 묶은 전집이 올 하반기에 나오고 내일, 백신애문학상 시상식이 있습니다. 백신애문학상 1회 수상자로 선정된 공선옥 작가는 “우리 사회 주변부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사회적 약자들, 특히 험난한 운명의 굴레를 뒤집어 쓴 여성들에게 깊은 애정을 가지고 그들의 팍팍한 삶을 활달하고 역동적인 문체로 묘사한 작가”(심사평)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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