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부끄러운 고백

  • 입력 2018.03.09 11:37
  • 수정 2018.03.09 11:38
  • 기자명 김정열(경북 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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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투성이 여성들이 울고 있습니다. 피투성이 여성들이 용기를 내 세상을 바꾸고 있습니다. ‘#Metoo’ 운동은 개인에 대한 폭력을 넘어 여성에 대한 남성의 폭력, 권력과 위계에 의한 폭력, 다수에 의한 소수의 폭력, 관습이라는 이름의 폭력에 대한 저항과 투쟁을 통해 지금보다 더 민주적이고 더 정의로우며 더 평등한 사회를 이룰 것입니다.

김정열(경북 상주)

그러나 저는 아직도 여전한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녀들처럼 용기 내어 말도 못 하고 이불 뒤집어쓰고 글만 올립니다.

설을 쇠고 나니 이런저런 모임들이 들썩입니다. 새로운 해를 맞기도 하거니와 이제 곧 일철이 되니 그 전에 한 번 모이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동네도 얼마 전에 부녀회 총회와 마을 윷놀이를 했습니다.

그 두 모임을 하고 난 소감을 딱 한 마디만 하라면 “이제 그만!” 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참말 이제 그만하고 싶습니다. 불만은 있었지만 지금까지 동네 분들이 살아온 방식이고 관습이니 뭐라고 말은 못 했습니다. 그러나 즐겁지는 않았음을 이제야 고백합니다.

‘부녀회’라는 이름도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부녀회가 뭡니까? 1970년대 박정희 정권 때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마을단위로 여성들을 조직한 모임이지요. 정식명칭은 ‘새마을부녀회’. 박정희 정권의 독재에 비판적이고 새마을운동이 우리 농촌을 피폐화 시켰다는 입장을 갖고 있는 저인데 어쩌다보니 부녀회 총무를 10년도 넘게 해 오고 있습니다.

우리 동네 부녀회는 별로 하는 일은 없습니다. 1년에 한 번 하는 총회가 가장 큰 행사입니다. 총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회의 준비가 아니라 점심준비입니다. 총회라 해 봐야 채 30분도 안 걸리고 후딱 해 버리지만 점심 준비는 며칠 전부터 모여서 의논해야하고 장도 봐야하고 그 날 하루는 허리 펼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날의 가장 큰 일은 우리 부녀회 회원들의 점심대접이 아니라 남자들의 점심대접입니다. 이장님을 비롯해 면, 조합 손님들, 부녀회 남편들을 부르는데 이 사람들 뒤치다꺼리가 가장 큰 일입니다. 정작 우리는 대충 먹고 손님들 상 차리고 치우고 하느라 하루가 다 갑니다.

그렇게 총회를 치르고 올해는 부녀회장님께 큰 맘 먹고 그러나 소심하게 눈치 보며 말했습니다. “내년부터는 우리 나가서 사 먹어요.” (나 남자들 뒤치다꺼리하기 싫어요. 이 말은 마음속으로만. 이 마을 세상을 뒤엎을 용기가 없어서….)

동네 윷놀이 때는 말 할 것도 없습니다. 하루 종일 뒤치다꺼리입니다. 아침부터 술상보고 점심하고, 점심상 치우고 또 술상보고. 그러다보면 윷놀이는 끝나고 해는 서산에 기웁니다.

더 힘든 것은 윷놀이는 끝나도 술 마시는 남자들은 끝낼 줄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올해도 그러길래 부녀회장님이 “이제 치우고 고만 갑시다” 했다가 욕만 얻어먹었습니다. 동네사람들이 모여서 이야기 하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데 부녀회장이 되어 가지고 자꾸 치우려고만 한다고 훈계까지 들었습니다.

‘참, 그렇게 좋은 일이면 그렇게 좋은 사람들끼리 먹고 치우던지. 차리고 치우는 사람이 따로 있으니 좋은 것이겠지!’

이럴 때도 속으로만 흥분하고 겉으로는 표시도 내지 못 했습니다. 먹고 마시는 것을 차리고 치우는 것이 여성만의 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도 나는 왜 말하지 못 했을까요? 스스로에게 물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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