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협궤열차④ ‘어천굴’ 속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까

  • 입력 2018.03.09 11:35
  • 수정 2018.03.09 11:37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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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인천 발 협궤열차의 수원 종점을 한 정거장 앞둔 어천역.

이상락 소설가

그러나 이제 다 왔다, 하고 안심할 계제가 아니었다. 경사가 만만치 않은 고갯길이 남아있는 데다 하필 언덕에 200여 미터 길이의 터널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 터널을 ‘어천굴’이라 불렀다. 드디어 기차가 터널로 진입했는데 기관사 박수광은 심상찮은 낌새를 느꼈다.

“아침 첫차였는데, 그날따라 군자역에서 소금을 잔뜩 실었어. 아무리 꼬마 열차라 해도 그 정도의 화물적재량쯤은 평지에서야 거뜬했을 텐데, 문제는 일제시대에 뚫은 오래된 터널이라 천장에서 물이 줄줄 새는 관계로, 철로가 아주 미끄러웠거든. 아니나 다를까 터널을 3분의2쯤 지난 지점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 하고 기차가 헛바퀴 질을 하는 거야.”

기관실은 삽시간에 벙커씨유가 불완전연소를 일으키면서 내뿜는 지독한 연기로 가득 찼다. 그런 때를 대비해서 기관사와 기관조사는 물수건을 준비해 두었다가 얼굴을 감싼다. 자칫하면 벙커씨유의 연기덩어리에 기도가 막혀서 위험한 상황을 맞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객실에서도 야단이 났다. 기관실에서 뿜어져 나온 연기가 터널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자욱하게 고여 있다가 객실로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승객여러분, 연기 들어오니까 다들 객실 문을 닫고 조금만 기다리세요. 내가 내려서 기관실에 뭔 일이 있는지 알아보고 올 게요!”

차장이 객실을 나와 철로로 내려선 다음, 기관실 쪽으로 가서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런데 다음 순간, 갑자기 목구멍으로 훅, 달려드는 매연 때문에 차장은 그만 숨이 막혀서 기절을 하고 말았다.

“안 되겠어. 내리막길로 후진을 해서 일단 터널을 빠져나가야 돼!”

기차가 내리막길을 후진하여, 연기 자욱한 터널을 빠져나올 때까지, 매연에 기도가 막힌 차장은 여전히 혼절한 상태로 기관실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입에 물을 떠 넣어야 돼. 저기 철길 아래 도랑으로!”

기관사와 기관조사가 늘어진 차장의 사지를 나눠 잡고서 언덕아래 도랑가로 ‘운반’하였다. 그릇이 없었으므로, 기관조사가 기름투성이의 두 손으로 도랑물을 떠서는 차장의 입에 넣기를 서너 번, 드디어 차장이 기침을 캑캑거리며 일어났다. 살았구나! 기관실 식구들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런데 간신히 정신을 수습한 차장이 일성으로 이렇게 소리치더란다.

“기관조사, 너 이놈! 그 던적스런 손으로 물을 떠서 내 입에다 넣은 거야? 넌 죽었어!”

죽은 차장을 살려냈으니, 이제 다시 기차를 움직여야 했다. 그러나 어찌어찌 해서 다시 터널로 진입하더라도 그 미끄러운 구간을 어떻게 지나느냐가 문제였다. 아직 기진한 상태로 휘청거리는 차장을 대신해서, 기관사 박수광이 객실을 향해 호루라기를 길게 불었다.

“어이, 남학생들, 전부 내려!”

기차에는 수원으로 통학을 하는 꽤 여러 명의 중고등학생 승객들이 타고 있었다. 그들이 영문 모르고 철길로 내려섰다.

“저쪽에 가면 비상 모래 함이 있으니까, 각자 모래를 퍼갖고 와서 철로에다 뿌려라!”

“모래를 퍼오려면 무슨 그릇이 있어야….”

“그릇이 없긴 왜 없어. 늬들 머리위에 있잖아!”

학생들이 각자 모자를 벗어서는 모래를 담아왔다. 그들은 철로를 따라 모래를 뿌리면서 앞으로 나아가고, 그 뒤를 꼬마 열차가 살살 따라 움직였다.

왕년의 협궤열차 기관사 박수광씨는 그때를 생각하면 아찔함, 한편으로 흐뭇해진단다.

“그 날 아침에 수원역에 내린 승객들을 보니 그 터널 속 매연 때문에, 흰옷 입은 사람은 숫제 검댕 투성이가 돼버렸고, 얼굴이며 콧구멍이 모두 시커먼 거야. 하지만 불평 한 마디 하지 않고, 역사 벽면의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면서 키득키득 웃더라니까, 글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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